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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Robin Jan 13. 2023

이재 이야기

18. 매너리즘(Mannerism)에 반대한다

*


   이재는 좀 충격을 받은 참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쓴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를 오랜만에 들춰봤는데 문장들이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 아니라-그것을 기억한다는 게 무리- 그 책을 읽으면서 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여놓은 페이지를 보다가 왜 거기에 이재는 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여놓았는지 수수께끼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이재의 책을 빌려다 그어놓은 것을 보는 것 같은 생경한 기분이었다.


  수전 손택의 그 책을 읽을 당시의 이재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쏟지 못한 채로 그야말로 영혼이 속박당했다 생각하며 홀로 너무 가난한 외로움의 매너리즘(Mannerism)에 흠뻑 빠져 있었음을 떠올렸다. 갓 청년의 수식을 달게 된 젊음은 똑똑한 척은 해도 현명하기는 도통 어려울 때이니 만큼,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은 가난한 외로움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매우 충분한 조건이었다.



   특히,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너무나 문학적인 제목에 이끌린- 중, 수전 손택이 인용한 글의 일부분에 이재는 줄을 여러 번 그어놓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이 모순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 문화는 다른 문화와의 소통이 적을수록 다른 문화에 의해 몰락할 확률이 낮다. 반면에 이런 상황에서는 이 문화권의 밀사들이 문화적 다양성의 풍요로움과 중요성을 이해할 확률도 낮아질 것이다. 어느 한쪽이든 택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를 방랑하고 있는 나는, 나로서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아마도 내게 경멸 아니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경이로운 경관을 마주하고 있다. 아니면 내가 사는 시대의 방랑자, 사라져 가는 실체를 찾기에 급급한 자, 어느 쪽이 됐거나 나는 오늘날 실패한 사람이다. (중략)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며 하릴없이, 지금 형성되어 가는 장면을 놓칠 것이기에."


  브라질에서 1935년에서 1939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브라질 오지의 원주민 부족 마을에 들어가 생활했던 레비-스트로스가 15년에 걸쳐 쓴 <슬픈 열대>에 대해  수전 손택은 기록이 아니라 회고록이라고 한 이유를 저 인용 부분에서 이해하게 된 것은 오늘의 이재이다. 

  과거의 이재는 "한 문화는 다른 문화와의 소통이 적을수록 다른 문화에 의해 몰락할 확률이 낮다."에 대해 줄을 여러 번 긋고 인덱스를 붙여놓았다. 왜 그랬을까? 현재의 이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다만 어린 이재가 수전 손택의 지성에 얼마나 현혹되었던가 하는 것만 떠오를 뿐이다.-그 또한 이재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었을 터- 그리고 이재가 사랑한 사진작가인 애니 레보비치(Annie Leibovitz, 1949~ )와 수전 손택이 죽을 때까지 연인 사이였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 곁가지만 기억이 나고 중요한 내용은 잊어버린 게 허무하다. 망각은 과연 신의 선물인가? 

   


  어쨌거나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인한 가난한 외로움의 매너리즘으로부터 이재는 벗어났는가? 이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은 죽는 날이 아닐까 한다. 어릴 때의 이재는 거기에 지배당했고 지금의 이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때로 그렇고 그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났다가 다시 발목 잡히는 것을 반복하는 게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셈이다. 특히 그 "상대적"이라는 개념에 실낱같은 객관성을 유지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일하고 밀린 돈이 다 들어와 목을 졸라대던 대출금 일부를 갚으며 '상대적으로' 풍족한 12월을 보냈다 생각했지만 그 돈들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할 때는 이재는 그렇게 춥고 괴로운 12월이 없다 여겼다. 그렇게 통장의 돈이 말라갈 때마다 이재는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수익구조에 얽매이는 자신을 탓하며 여전히 상대적 박탈감에 짓눌린다. 며칠 상간으로 너무 간사해서 창피하다.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나는 이불 아래 파묻힌 채 나를 때려눕히려고 마음먹은 적대적인 세상을 떠올린다."

  라고 한 것처럼. 

  그런 말을 한 그는 그래도 황제였으니까 그 말이 멋있어 보이기는 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우렐리우스도 매너리즘과 평생을 씨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

  그래서 이재는 매번 반복하고 시달리는 매너리즘을 알아본다. 

  

  - 원래 매너리즘(Mannerism-영어, Manierismo-이탈리아어, Maniérisme-프랑스어)은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풍미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17세기 이후부터 미술에 관한 문헌에서 쓰이기 시작하다가 함축된 복합적인 의미로 문학비평 및 신학에서도 통용되었다. 

  명칭 자체는 '스타일, 양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했으며, 개성적인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 혹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던 매너리즘이 요즘에 와서는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을 가리키게 되어 이른바 "타성(惰性)"이라는 말과 닮았는데 그것은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 또는 오랫동안 변화나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이다. 


  이재가 반복하는 매너리즘은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기도 하지만 매우 수동적인데 공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전 손택의 책 이름을 빌려 "매너리즘에 반대한다(Against Mannerism)"라고 말해본다. 입 밖으로 내놓고 보면 그게 더 사실적이다. 

 가끔 이재는 그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다른 사람 보듯 그녀 자신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쟤가 또 저러고 있네'하면서. 그것은 그런 매너리즘에 빠진 그녀 자신에 대한 자기 연민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재가 현명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대해 가지는 애틋함이 불러온 것들은 어떻게 구체화하려고 할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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