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달콤한 꿈같은 시뮬라시옹(Simulation)-E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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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이재가 좋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매우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사는 이재에게-공상을 즐기는 것과는 별개로- 이 개념을 처음 배울 때는 팽이가 도르르 도는 것을 한참 보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한 가지 소재를 정해 한 학기 동안 주야장천 반복하여 이해의 단계를 쌓아하는 타입이었다. 이재는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드는 것보다 넓게 그물을 펼쳐서 좁혀 들어가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그 교수의 수업은 지루함과 인내심의 싸움이었다. 지난 시간에도 질문한 내용을 같은 사람에게 또 묻고 지난 시간과 답이 왜 같은지를 파고들거나 다른 답변을 한 경우는 왜 논리가 달라졌는지에 대해 증명 가능한지 질문을 했다. 결국 준비가 멍청한 경우, 자폭으로 끝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 질문을 당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보는 모두에게 고역임에 틀림없던 4시간 여의 수업시간이 끝나면 의자에 널브러졌다. 그 질문을 당하는 사람을 돕고자 의견을 제시하다가는 같이 자폭하게 되니, 어설픈 정의감과 동지애는 잠시 넣어두는 요령도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고작 4명이 정원인 수업에서 서로 구해줄 여유도 없긴 했었다.
그런 시간에 배웠던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니, 처음 느낌이 좋을 수가 있나?
그 교수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는데 발음이 아주 정확했다. 독일에서 철학으로 박사논문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그는 다리 한쪽이 편치 않아 강의실로 들어올 때, 철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탁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농담도 항상 독일식이어서 그것이 농담인 것을 하루 지나 깨달을 때가 많았다.
지팡이를 짚는 손의 다른 쪽에는 슬라이드와 참고서적이 한 보따리여서 그 걸음 소리가 늘 묵직했다. 들어주려 손을 내밀어도 괜찮다 만류했다. 그 교수는 수년간 정교수는 못 되고 강사로 내내 머무는 사람이었다. 이재가 보기에 가장 교수답고 인격적으로 훌륭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정교수는 될 수 없겠다 싶은 사람이었다. (항상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가장 잘 가르치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은 정교수가 되지 못한다.)
이재의 논문 주제가 어렵게 정해지고 난 후, 그 논문에 대한 자료와 도움은 지도교수보다 오히려 그 교수가 적극적으로 주었고 그것이 큰 길라잡이가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교수의 수업시간이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그 반복적으로 이해의 수준과 단계를 높여간 수업의 효과일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창 밖에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해 몽환적이기까지 하던 오후에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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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이재군(그는 모든 학생에게 군을 붙여 불렀다), 어제 나와 삼겹살을 먹었습니다. 기억납니까?"
이재 : "네?(심히 당황하여 대답을 못함)"
교수 : "그렇다면, A군은 어떻습니까? 삼겹살을 먹었습니까?"
A군 : "저는 다른 것을 먹었습니다."
교수 : "누구와?"
A군 : "교수님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교수 : "확실합니까? 어제 먹은 다른 것은 삼겹살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A군 : "파전에 막걸리를 먹었으니 그것은 확실합니다."
교수 : "그 자리에 내가 없었던 것도 확신합니까?"
내내 이런 식으로 이재를 포함한 모두에게 삼겹살을 먹었는지, 물었다. 나중에는 삼겹살을 안 먹었어도 먹었다 해야 그 질문이 끝이 나려나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슬라이드로 띄어놓은 사진은 불판에 올려진 삼겹살 사진이었다.
1시간 동안 주고받은 질문은 그저 삼겹살이었다. 삼겹살을 먹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하다고 이재는 생각했던 게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이렇게 시작해서 그다음 주 시간에는 다시 삼겹살이 등장했는데 시점은 지난번과 달리 과거 어느 시점에 누구와 먹었는지 몇 명이었는지, 그는 정말 당신과 먹은 게 맞는지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다다음 주 시간에는 삼겹살이 또 등장해서 소주와 마셨는지, 사이다를 마셨는지 뭐 그런 식의 질문이 항상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이재가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떠올리면 당연한 듯 삼겹살이 연상하게 된 배경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학기에 삼겹살을 가장 자주 많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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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의미하는 철학개념인 시뮬라크르(Simulares)의 동사적 형태인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삼겹살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 한기동안 이재는 머리가 꼬일 정도로 배워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이 작용하는 것을 말하는 시뮬라시옹에 대해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식 그 자체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이미지 즉, 인식이다.”
라고 한 것이다.
시뮬라시옹은 결국 원본보다 더 나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나중에는 단순한 복제물에서 더 나은 어떤 것이 나오는데 현대에서는 그 단순한 복제물이나 물건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예시는 미키마우스였다. 생쥐가 진짜이고 시뮬라크르는 미키마우스인데, 우리가 미키마우스를 소비하는 것은 생쥐가 아니며 그것을 볼 때 생쥐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디즈니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교수는 삼겹살을 먹었는지, 그런 행위가 실제로 있었나에 대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끊임없이 되물으며 그 개념이 박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우리가 삼겹살이라고 먹은 것이 정녕 삼겹살인가, 무엇으로 그 인식을 확신하는가로 질문이 이어졌다.
이재는 데생을 배우며 그 속성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매칭시키고 통찰을 얻으려 한 스토리텔링이 결국 시뮬라시옹이라는 데에 도달했다. 삼겹살, 미키마우스가 아닌 이재 자신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허상이었던 셈이다.
환상(Illusion) 속의 이재가 아니라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재인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데생은 계속될 것이며 수채화, 유화, 아크릴화 그 무엇이던 채색의 세계도 남아있으니, 이재가 자신을 둘러싼 것들 속에서 통찰을 얻으려 하는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만 모노크롬 시뮬라시옹은 일단 여기까지.
이만 총총.
End of Document-이재(怡栽) 이야기 Par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