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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이를 태운 아침

by 둥둥

새벽부터 시작된 고된 육체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스티로폼 박스 하나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영민과 숙경은 강원도 속초로 여행을 갔다가 장작불에 구워 먹은 생양미리의 맛이 반할 만큼 부드럽고 담백해서 해산물을 좋아하는 딸과 사위를 떠올렸다. 제철을 맞은 생선이 알을 배고 살이 잔뜩 올라 통통하다며 산지에서 바로 부친 양미리 한 박스. 부푼 마음으로 택배 송장에 딸네 집 주소를 적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들이었다.

숙경과 영민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와 마주 앉아 양미리를 구워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 역시 장인장모가 보낸 양미리를 먹겠다고 주말을 앞둔 저녁 식탁에 붙어 앉아 있을 리 없기도 했다.

싱싱한 양미리는 빨리 먹어야 한다는데 양이 제법 많아서 조심스럽게 이웃에게 함께 할 것을 물었다. 물었지만 아마도 요청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셋이라면 둘보다 빠르고 더 마음 편하게 양마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양미리를 굽고 뜨거운 밥을 지어 냉장고에 있던 반찬 두어 가지를 싸서 작업실로 갔다. 꽃향기를 방해할까 봐 취식에 조심스러웠던 숱한 끼니들이 언제였냐는듯, 플라워 클래스를 하던 넓은 테이블에 양미리 반상을 소담하게 차렸다. 누군가에게 나의 손맛을 선보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라 약간 쑥스러웠다.

특히나 이웃에게는 정말 맛있는 한 끼를 차려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펼쳐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욱 아쉽기만 한 밥상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와 웃은 조금 식은 양미리 구이를 마지막 한 마리까지 보란 듯이 잘 먹어주었다.


오늘 저녁은 내가 차렸지만 평소의 그들은 틈만 나면 내 끼니를 걱정하는 게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이웃으로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나눈 끼니가 많아서 이웃 자매는 나의 먹성과 뱃구레를 잘 알고 있었던 게 걱정의 씨앗이 됐다. 밥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해도 그것대로 이상할 상황이긴 했지만. 요즘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안 먹고도 살아졌다. 맛이 제 맛으로 안 느껴지니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행위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고, 차라리 별 것 안 먹는 게 입도, 속도, 마음도 편했다. 바쁜 연말에 시간을 더 많이 쓸 수 있고, 돈도 아낄 수 있고, 나름대로 다이어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지속되면 큰 문제가 될 식사량인 건 분명해서 나도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이웃은 자기들이 먹으려고 산 떡도 나누어 주고, 사과도 가져다주고, 유부초밥도 싸다 주고, 김밥도 사다 주고. 본진에서 가져온 김치에 동지팥죽까지 챙겨 와 먹여주기에 적극이었다. 멀리 둥지를 떠났다 돌아올 때면 새끼를 위해 먹이를 물고 돌아오는 부모 새들처럼, 출근하면 항상 내 입에 무언가를 물려주어야 안심이 되는 듯 보였던 이와 웃. 그런 이웃이 몹시도 고마워 그들이 챙겨주는 것만큼은 남김없이 꼭 다 먹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먹을 만치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웃의 걱정이, 얘가 밥을 ‘얼마나‘ 먹느냐에서 ‘누구와’ 먹느냐로 포커스가 옮겨갔다. 그 무렵의 나는 시간이 맞으면 그와 한 테이블에서 종종 밥을 먹기도 했다. 물론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밥맛 떨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시간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싫어 죽겠어서 하는 이별이 아닌 만큼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는 사이였다.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혼의 절차와 그에 앞서 상의할 것들 역시 함께 식탁에 앉은 시간에 이야기했다.

이를 들은 이웃은 그게 밥이 제대로 넘어가기나 하냐며 수시로 나의 밥친구가 되어주었다. 퇴근이 늦어지면 저녁시간이 지났다는 핑계로 함께 밥을 먹고, 주말이 되면 혼자 밥 먹을 나를 위해 별별 이유를 만들어 내어 함께 밥 먹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 핑계 중 단연 최고였던 건 <마침> 에피소드다. 저녁 여덟 시쯤, 퇴근한 이웃에게 카톡이 왔다.





-웃 : 낼 몇 시에 나와~??


-나 : 낼 꽃시장 갔다가 아홉 시쯤 되지 않을까 ㅋㅋㅋ


-이 : 내일 우리 집 점심메뉴가 미역국이라 ㅋㅋㅋ

마침 그래서 ㅋㅋㅋ 오면 어떻겠노?


- 나 : 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

마침 그런거 맞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 : 어 때마침 그렇잖아 ㅋㅋㅋㅋ

내일 한시쯤 묵으러 와 ㅋㅋㅋ


- 나 : 그래 ㅋㅋㅋㅋㅋㅋ 행복하네 벌써ㅋㅋㅋㅋ


- 이 : 엉 근데 미션이 하나 있어

스툴을 좀 하나 갖고와야돼 ㅋㅋㅋㅋ

마침 의자가 2개뿐이라 ㅋㅋㅋㅋㅋ

다 버리고 ㅋㅋㅋㅋㅋㅋ


- 나 : 셀프로 앉을자리 마련하는 시스템이네 ㅋㅋㅋ 그쯤이야 들고 가지 ㅋㅋㅋ


- 이 : 엄마한테 미역국 걱정은 하시지 말라고 전해 ㅋㅋㅋㅋㅋㅋㅋ


- 나 : 그럴게 ㅋㅋㅋㅋㅋㅋ 엄마가 감동받겠다


- 이 : ㅋㅋㅋㅋㅋㅋ마침 그렇잖아 내일 무슨 날도 아닌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 : 그러니까 마침!!! ㅋㅋㅋㅋㅋㅋ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 웃 : 마침 딱 잘됐구먼!!!!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날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뚫고 아르텍 스툴 하나를 옆자리에 태워 이웃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조용히 소란스러웠다. 문이 열리니 이웃의 등 뒤로 방금 전까지 분주했을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는 마침 오늘의 메뉴였던 미역국을 중심으로 한 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생선을 굽고, 계란말이까지 예쁘게 부쳐 둔 것이 자취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경을 잔뜩 쓴 것을 알 수 있는 손길이었다. 마침 디저트도 롤케익이라 없는 초 대신 성냥을 꽂아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 어느 때보다 미역국 맛이 깊고 진한 생일이었다.

숙경은 이웃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한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유부초밥을 먹을 때마다, 이웃이 건네주었던 종류의 사과를, 떡을, 팥죽을 먹을 때마다 이웃의 따뜻한 마음이 떠올라 위장 아래 어딘가부터가 아직도 뜨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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