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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by 둥둥

어제는 이런 꿈을 꾸었다. 아주 짧았던 걸 보니 깨어나기 직전에 꾼, 무의식과 의식의 영역 중 의식의 영역이 큰 꿈이었을 것이다. 꿈에서의 나는 평소 잘 보지도 않는 웹툰을 정독하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가 누르는 회차의 에피소드 제목은 공교롭게도 <최종화>였다. 그의 작품이다. 서운하고 아쉽기보단 뭐랄까 비장한 느낌으로 봐야만 하는 마지막화였다. 웹툰을 열어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3월 2일이고, 우리의 서류상 결혼생활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가야 하는 법정 기일이었다. 따스한 볕에 봄 눈이 사르르 녹던 13년 전 어느 화요일. 3월 3일은 우리가 처음 사귀기 시작했던 날이다. 마치 정해둔 유효기간이 만료되기라도 하듯 그렇게 기가 막힌 날짜에 우리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 중 누구도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치밀하게 의도하지는 않은 것처럼, 이 드라마틱한 날짜 역시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그와 나는 많이 다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서로를 사랑했다. 다르고, 사랑한다는 두 사실이 우릴 하나로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이제는 둘이 된다. 사랑하지만 너무 달라서. 나는 그 차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함께 한 13년의 생활에 비하면 이혼을 결심하게 된 날들은 턱없이 짧았고, 둘의 그 결의가 문서로 공인되는 과정은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현실의 속도에 마음이 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장 오래 걸렸던 것은 이혼신청서를 법원에 처음 제출하기로 마음먹기 까지다. 4주간의 조정 기간을 거치고 모든 협의를 마친 오늘까지 걸어왔더니, 남은 건 두 번째 법정 기일에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조정실에서의 3분이 전부였다.

의자를 빼고 판사 앞에 나란히 앉는 1분. 판사가 묻는 이 이혼에 동의하느냔 질문에 그도, 나도 ‘네’ 한 음절씩 대답할 1분. 판사의 이혼 선고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다시 정리하는 1분.

머리도, 몸도 빠르다. 그저 마음만이 제일 뒤에 있다.


법원을 나와 주차장에서 한참을 있었다. 그는 담배를 태우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차에 혼자 앉아 차분히 낮은 숨을 내쉬었다. 차창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따뜻했다. 드디어 봄이었다. 지난 두 계절동안 나를 모질게도 휩쓸고 간 아픈 바람은 이제 잠잠해질 날만 남았다. 눈물이 났다. 슬픔이라고만은 이야기할 수는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힘겹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내가 휘청였던 자리마다 사랑하는 이들의 발자국들이 부지런히 찍혀있었다.


이제 법원에서 받은 이혼확인서를 구청에 제출하는 절차가 남았다. 세 달 안으로 구청에 이혼확인서를 접수하지 않으면 이 모든 과정이 무효가 된다. 반드시 서류를 제출을 해야만 가족관계가 완벽히 정리되는 시스템이었다. 맺는 것보다 끊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구청은 법원 바로 옆이라 우리는 지체할 것 없이 효율을 다하기로 했다. 다만 나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곧바로 구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청에 서류를 내는 데엔 두 명 다 필요한 건 아니라서 이번엔 그 혼자 들어갔다. 멀리서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 겨우 눈물을 멈추고 주변을 보니 법원에서 보았던 곧 헤어질 커플들이 구청에서도 나란히 보였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생경함에 살갗이 날카로운 기분을, 두 번째 보는 여러 커플들 사이에서 그만 혼자 겪겠구나 생각했다. 그는 한참 뒤 차로 돌아와, 마지막 이 감정을 네가 겪지 않아 다행이라며 내게 차갑고 달달한 커피를 건넸다. 기분이 안 좋을 때 그가 달래주는 방법이었다.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알 것 같은데 너무 여러 가지라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걸 거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그제야 참 많이 울었다. 나는 그에게,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데 왜 우냐고 했지만, 사실 알고 있다. 나보다 그가 이 이별에 더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그렇다고 내가 힘들지 않은 게 아니라, 그가 더 많이 힘들 거라는 걸.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는 일이란 생각보다 더 큰 용기와 자존이 필요하므로. 그에게 그 두 가지가 충분할지 물어본다면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이런 애잔한 구석과 나의 이 미련한 이해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오래전에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마당에도 여전히 힘들다.

법원에서부터 구청까지 줄곧 보이던 구 부부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얗던 하늘에 붉은 슬픔이 북받쳐 오를 때까지.

구청 앞 주차장에서 우리는 한참을 울고 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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