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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얼음 Mar 22. 2021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가능할까

공간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은 가능하지만, 정신적 독립은?

인생에서 부모님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산 만큼의 세월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았다. 두 기간이 이제는 얼추 비슷해졌다는 건 인생의 반을 독립해 혼자 지냈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홈스테이를 했으니 그때부터 ‘독립’이라는 단어는 내 곁에 머물게 되었다. 

 

부산이 본가인 내가 서울로 대학교를 입학하면서 첫 자취를 시작했다. 홈스테이 보호자도 없는 확실한 공간적 독립이었다. 내가 여자라 걱정이 많으셨던 부모님은 대학 근처 큰 사거리에 위치한 번듯한 오피스텔 원룸을 구해주셨다. 어린이대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파크뷰의 원룸이었는데 지금 시세로 따져도 매우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감사한 마음이 크지만 휴학까지 포함해 거의 5년 동안 낸 월세가 너무 아까울 정도로 그 동네는 치안이 좋아 좀 더 싼 곳으로 갔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더 싼 곳으로 옮기려 집을 알아봤었는데 엄마가 본인 마음이 너무 불안하다며 반대하셨다. 부모님의 자식사랑이란 이런 것에서 나오는 거겠지만 애통하게도 당시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어렸는지 괜한 짜증을 많이 냈다. 엄마가 올라오시면 항상 집 청소를 해주고 가셨는데 나름 혼자 깨끗하게 하며 살았지만 엄마만 왔다 가면 몰라보게 새 집이 되어있었다. 비어가던 냉장고도 든든히 꽉 채워져 당분간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취업을 하자마자 회사 근처 원룸으로 이사를 하면서 스스로 월세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처럼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고 싶었고 당연하다고 여겼다. 월세, 관리비, 가스비, 수도비를 처음으로 책임지다 보니 생각보다 은행에 갈 일이 많았고 엄마가 왜 그렇게 이 곳 저곳 다니고 통화하며 바빴는지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번거로움의 극치였고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전혀 모를 것들이었다.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인데 부모님은 매번 이런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왔던 거구나. 


내 돈으로 원룸에 월세를 내다보니 코딱지만 한 정도의 공간에 드는 돈이 너무 아까워져 회사생활 6년 차에 다시 전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원룸생활을 한 지 총 10년 차이기에 좁은 공간이 신물이 나기도 했고 무조건 투룸을 전제로 매주 평일 주말 마다하지 않고 부동산과 집을 구경 다녔다. 매 번 이사할 때마다 엄마가 부산에서 올라와 집을 보러 다니고 고를 때 도움을 주셨다. 이 번에는 정말 괜찮다고 혼자 알아본다고 고집을 부렸는데도 나를 못 미더워하셨는지 기어이 올라와 함께 부동산을 돌아다니셨다. 결론은 혼자 알아봤으면 큰 일 날 뻔했을 정도로 엄마의 도움이 빛을 발해 더 좋은 집을 구했고 전세를 계약할 수 있었다. 공간적, 경제적인 독립은 시작한 지 좀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독립은 아직도 힘든 모양이다. 30대가 되어서도 아직도 물어볼 것이 많고 아직도 도움을 받고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우리 집에서 내 포지션을 말하자면 아들 같은 딸이다. 애교가 많은 엄마와 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그녀들의 하이텐션을 누르는 과묵한 아들 같은 역할은 내가 했다. 엄마에게 조잘조잘 일상을 떠드는 딸은 언니가 해왔고 나는 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딸이었다. 나도 남자 친구가 생기면 나름 애교가 있는데 이상하게 가족에게는 낯 간지러워 표현을 잘하지 못한다. 연락을 자주 드리지도 않고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설사 어떤 고민이나 힘든 일이 생겨도 괜히 말씀드리면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을 걱정하며 그저 마음만 아파하실 것 같아서 더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부산 본가에 내려간다. 힘든 이야기를 꺼내진 않지만 그냥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힘든 일을 좀 잊을 수 있다. 한참을 오래 떨어져 살았다 보니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 잠시라도 붙어있으면 사소한 것들로 다투게 되지만 그 마저 힘이 될 때가 있다. 엄마 아빠가 아직 나와 다툴 기력이 있다는 건 건강하시다는 뜻이기도 하고 조금 이상한 논리이지만 다투다 보면 힘든 일이 잊힌다. 그냥 존재하는 것 만으로 힘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 나이에도 ‘집에서도 양말 신어라’, ‘몸 따뜻하게 하고 다녀라’, ‘외식하지 말고 집 반찬으로 챙겨 먹어라’ 등의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아직도 ‘쌀벌레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해?’, ‘생강청 오래 지나면 버려야 해?’, ‘바지 수선은 어떻게 해?’ 등 물어볼 게 천지다. 따지고 보면 부모님은 이미 내 나이에 엄마 아빠가 되어 언니와 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도 전화해서 물어보다니 새삼 대단할 수밖에 없다. 

 

감히 예언하건대 공간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은 이미 성공했어도 정신적 독립은 평생 못할 것이다. 30대의 내가 앞으로 40대, 50대, 60대를 맞이할 때도 매일매일이 처음이라 물어볼 것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내일은 처음이고 나보다 오래 살아온 인생 선배인 부모님에게 의지하게 되는 건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나를 조건 없이 보듬어주는 유일한 쉼터는 가족뿐이라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되어서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으로 더 의지하게 된다. 다른 의미의 독립은 점점 더 잘하게 되는데 왜 정신적인 독립은 그 반대인 것인지. 괜히 뜬금없이 삼계탕은 어떻게 끓이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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