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격 (Slash)

by 골든라이언

53이 말했다. "이 작전은 아직 비밀리에 이주를 진행 중인 스네일의 조직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그들의 이주에 대한 비민주적 행태를 고발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이주에 대한 반대 의사를 가진 이들을 구출할 대의명분으로 사단들을 이끌고 저들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면 스네일들은 박스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은 53의 지시에 따라 스네일 기지에 잠복하고 있는 언더커버들에게 3가지 지령을 내렸다. 박스를 찾는 듯한 비정기적 동선을 노출시켜 일부러 체포될 것, 집단이 형성되면 소요 사태를 벌릴 것 그리고 혼란 한 틈을 타 이중첩자를 색출해 소멸시킬 것. 임무 완수 시에는 안전한 복귀와 포상 그리고 원하면 명예제대까지 보장한다는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면서도 21은 53에게 보다 적극적인 전략을 제시했다, "만약 저들이 그 박스의 암호를 풀게 되는 날이면 언더커버들을 이용한 이 작전도 다 소용없는 카드입니다. 그들을 포기하더라도 선제공격으로 스네일의 전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혀야 합니다. 만약에 박스의 암호가 풀리게 되더라도 그들이 미처 손쓸 수 없게 만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 사단들의 병력 출정을 허락해 주십시오, 53 회장님"


53은 신중함을 요구했지만, 연거푸 계획한 전략들이 실패로 돌아간 21은 사실상 언더커버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비교적 장기간 심어둔 언더커버들이 스네일의 조직에 스며들면서 점차 그들의 심리가 이주 계획에 동조되는 듯한 징후가 비친다는 첩보가 있었다. 게다가 스네일 등이 SCF 3형제 기습사건 이후로 자신들의 기지에 언더커버들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을 텐데 어떤 식으로든 색출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충성심이 약해진 그들을 재흡수하면 우리 편의 사기를 떨어뜨릴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스네일의 비밀기지를 찾아내어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기세를 잡아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53에게 출정 승낙을 얻은 21은 자신을 따르는 세 사단장에게는 비밀리에 이렇게 별도의 지시를 해두었다.


'2,023을 치고 4,916셀로 바로 진격한다'


21의 3개 사단은 2,023셀의 비밀기지 근처에 도달해서 최후통첩 경고 메시지를 보낸 직후 바로 함대의 플라스마 집중포화로 비밀기지 입구 일부를 무너뜨리며 주변 시설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네일 함대 작전참모의 지시로 2,023 셀 보안 대장이 공격 전후로 21의 사단장들과 계속 연락을 취해 대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저들은 이미 통신교란장치를 써서 일방적인 수신만 가능하게 한 상태였다. 작전참모가 2,023 셀 보안 대장에게 물었다. "지금 총병력이 얼마나 있지?" "네 저 포함 13명입니다" "지시한 것 완료했으면 완전히 철수하라. 눈에 띄지 않게 지하 튜브를 이용해서 이동하고 셀 경계에서는 GJ (GAP JUNCTION, 공간 다리)를 통해 빠져나올 것. 이상"


그 시각 53은 셀 연합 위원회의 위원장의 호출을 받아 셀 연합위원회의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위원회로 가는 도중 21로부터 2,023셀에 있는 스네일의 기지 쪽에 양심적 이주거부자들을 풀어달라고 통보했으나 완강히 거부해서 무력 작전에 돌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민한 53였지만 이번만큼은 21의 교활한 거짓 보고를 눈치챌 수 없었다. "지금 셀 이탈 방지 위원회 소속 3개 사단이 2,023셀의 어떤 비밀 단체를 공격하고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소, 특정되지 않은 어떤 집단이 불법적 이주를 계획하고 있고 일부 그들의 조직 내부에서 이주하기를 거부하는 수십 명을 지금 2023셀에 있는 그들의 수용소에 강제로 감금시키고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안타깝게 소멸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셀 이탈 방지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고 시기를 놓쳐 더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장 빠르고 완전한 진압 작전을 전개 중이오"


한 위원이 직설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셀 이탈 방지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적인 목적의 무력을 쓰고 있는 게 맞습니까? 뉴럴네트워크사의 회장으로서 사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자신의 정체와 상황을 알고 있는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53은 내심 흠칫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저와 저의 회사를 조사하신 것 같은데,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만… 제가 EX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 이후 정보팀을 그만두고 ‘셀 이탈 방지위원회’를 조직한 이유는 우리 고향인 셀들의 보존과 번영을 위함이지 다른 뜻은 없소. 뉴럴네트워크사의 존재도 이를 위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지 사적으로 이용할 목적은 전혀 없소"


지켜보던 위원장이 물었다. "그렇다면, 귀사에서 사라졌다는 그 기밀 박스라는 것은…" '박스'의 민감한 단어에 평온해 보이던 53이 호흡이 살짝 흐트러지며 빠른 어조로 끼어들듯이 답한다. "그 박스에는 조금 전에 언급했던 구금된 분들의 신상정보가 들어 있을 뿐이요. 작전 수행 전엔 특일급 비밀이었지만 작전이 완료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소" "그럼" 위원장이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고 53의 눈을 보며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묻는다. "만약, 박스를 되찾게 된다면? 우리 위원회의 입회하에 파일을 공개할 수 있겠소? 당신도 잘 알겠지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색안경을 낀 불필요한 시선들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증인이 되어 드리리다. 가능하겠소?"


53은 고민했다. 어차피 암호는 나만 풀 수 있고 저들은 기밀 내용을 전혀 모르고, 박스에는 파일을 여는 순간에 기존 파일 삭제한 뒤 가짜 파일을 바꿔 넣어버릴 수 있는 안전장치도 있다. 잠깐의 뜸을 들인 후, "좋소,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별로 필요가 없어졌고, 어차피 나만이 그 암호를 풀 수 있으니 다른 이가 조작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소. 다음에 누구든 획득하면 이 자리에서 오픈하겠소" 위원장들을 비롯한 위원들이 서로 얼굴을 끄덕인 후, 좀 전에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위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을 들여 기다릴 필요가 없소. 들어오게"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이를 보자마자 53은 매우 놀랐다. "스네일?" 그 뒤로 박스를 들고 따라오는 로봇들과 함께 등장하는 트위스트를 보며, 한 번 더 크게 놀란다. 지금 21의 도발로 정신없이 대응하고 있어야 할 텐데, 심지어 박스까지 들고 이곳에 나타나다니! "자 53, 그대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암호를 풀고 파일을 공개하시오" 그때, 21의 사단 간의 통신 메시지가 53의 렌즈로 들어왔다. "당했음. 할루시네이션 (환각 현상). 속히 회군 요망"


속전속결을 위해 사단들을 이끌고 4,916셀로 향하던 21은 '함정' 메시지를 받고 망연자실했다. 21은 2,023셀 공격 직후 특수부대를 보내어 센터를 정밀 파괴함과 동시에 언더커버를 포함 한 생존자들을 모두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지체 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특수부대 대장이 막상 그의 대원들과 센터로 예상되는 위치에 진입했을 때… 텅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센터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하창고 같은 시설에 송수신 장치만 달랑 몇 대 있고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당했다. 할루시네이션 함정이다. 전 사단 병력 빨리 회군하라고 비밀 채널 긴급 메시지를 날려!"


첩자들이 드러내어 놓고 활동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스네일이 트위스트와 논의 후 프카회사에 긴급 의뢰, 2,023셀에 할루시네이션 기지 즉 가상 입체 이미지 기반의 가짜 부대시설을 미리 구축해 둔 것이었다. 혹시나 도청이 있을까 싶어, 회의 때도 일부러 2,023셀에 첩자들을 모아 두었다고 한 것이다. 보다 현실감 있게 보이기 위해 바깥쪽에는 몇 개의 부대 관련 조형 시설을 만들어 두었고, 실제로 통신의 발신 및 수신 위치 추적을 대비해 2023셀에 7명의 통신 설비팀을 직접 파견한 뒤 보안 대장에게 소수의 병력으로 경호하고 있다가 일단 21의 공격이 시작되면 그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철수할 것을 주문했었던 것이다.


21의 사단이 일방적인 통보를 하자마자 바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 것을 실시간 영상으로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7,584,623셀의 스네일 기지에 감금된 후 한 공간에 모여있는 53의 언더커버들이었다. "분명 무사 복귀를 약속했는데, 이럴 수가…" 53과 21을 믿고 4916셀 이중첩자까지 색출해 소멸시켰는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네일의 전략 참모가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선생님들께서는 목숨 걸고 충성을 다한 53일당의 진심을 보고 계신 겁니다. 이제 제군들이 어떤 입장을 취할 건지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다시 대화를 해봅시다"


한편, 21의 사단들이 서둘러 회군하려고 함선들을 급히 멈춰 세웠다. 혹시 잠복해 있을지도 모를 적들의 공격에 대비해 21이 타고 있는 사단장 함선을 중심으로 하는 수비적인 원형 대열을 갖추려고 하였다. 그때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전함들의 진행 방향에서 M1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이는 페론의 조사단에서 출동한 외인부대 대장 팀프의 작품이다. LPS 슈퍼볼 1~2단계를 준비하고 있다가 적군이 회군하는 시점에 맞춰 M1 출현을 유도한 것이다. 21의 사단들이 부랴부랴 자신들의 '트위스트 밤'을 사용하며 M1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페론군이 자신들의 진행 방향 앞쪽으로 LPS를 쏘아 올린 터라 자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전개되었다. 급히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전환을 시도했지만, 엉켜버린 진영의 후미가 돼버린 선두 전함들 일부와 두 사단장이 각각 타고 있던 지휘함이 M1 들에 의해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며 대형이 완전히 흐트러졌을 때, "바로 지금이다. 전 군 공격!" 대기하고 있던 스네일의 5개 사단이 세 군데 방향으로부터 21의 사단들을 에워싸며 플라스마 포를 퍼부었다. 뒤이어 페론 군도 가세해, 순식간에 두 사단장과 전력의 삼분의 일 이상이 소멸되자 21과 그의 나머지 병력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스네일군의 작전 참모가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21을 생포하고 마스급 함들만 노려라. 이제부터는 상대군 희생자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는 시나리오대로 기동 특수 여단함들을 출동시켜 대부분의 마스급 전함들을 신속하게 탈취하거나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위기를 직감한 21이 같이 있던 한 명의 사단장과 함께 속도가 빠른 작은 특수 전투함으로 옮겨 타고 불과 수십 대의 함선들과 탈출해서 달아나버렸다. 지휘관이 사라진 대부분의 전함들은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하고 함선의 색을 흰색으로 변경 후 항복 의사를 밝혀왔다. 스네일군은 이어 '트위스트 밤'으로 M1들을 소멸시킨 뒤 전리품인 마스급 전함들과 특수 전함들을 확보하였다. 간부급 몇 명만 포로로 확보한 뒤 항복한 대부분의 병력들은 비전투함에 나눠 태워 돌려보냈다.


같은 시각, 승전 소식에 트위스트 와 스네일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교활하면서도 공격적인 21의 기세를 완전히 꺾은 것은 53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흔들리는 53의 심리에 일격을 가해 그가 가진 비밀을 스스로 드러내게 할 것이다. 다음 카드를 꺼낼 차례다. 렌즈를 통해 막대한 전력손실과 함께 21의 작전 실패 소식을 접한 53은 적잖이 당황했다. 53이 대의명분을 내세워 스네일에게 쓰려던 전략에 오히려 당한 것이다. '21! 신중히 처리하라고 했는데, 기어코 공명심에 눈이 멀어 크게 당했구나…' 그러나, 무모한 작전이 벌어졌을 만큼 찾고 싶었던 박스가 당장 눈앞에 있고 여전히 이 상황의 운전대는 암호를 풀 수 있는 본인이 쥐고 있다는 생각으로 평상심을 유지한 체 말했다. "누군가가 저 박스를 훔쳐 갔는데 대신 찾아줘서 우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트위스트. 그리고, 스네일 자네는 오랜만이군 반갑네. 위원장님 그런데, 암호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분명 위원회 앞에서만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저 두 분은 박스를 두고 물러나게 해 주시오"


위원장이 말했다. "스네일 총사령관은 사실 셀 연합위원회에서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소. 그가 특별히 위원회의 요청으로 M1 조사단 트위스트부장의 도움을 받아 박스를 찾아온 것이니 두 분은 참관할 자격이 있고 내 위원장 직권으로 허용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지속적인 평상심을 보여주던 53의 커진 눈동자는, 어떻게 해서 스네일이 그렇게 규모 있는 지하 비밀 기지들을 여러 셀에 구축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비밀이 풀어진 것과, 이제 꼼짝없이 박스 오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교차되는 감정을 동시에 대변했다.


"하는 수 없군" 53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중앙 테이블 위에 놓인 '특 일급문서 블록체인 박스'에 다가가 암호를 풀기 시작했다. 53은 박스의 암호를 거의 다 풀어갈 무렵 벨트 속 숨겨진 버튼을 살짝 눌러 원래의 파일이 사라지고 다른 파일이 대신 자동으로 넘어가도록 시도했다. 그때 '파일 훼손, 삭제 시도. 경고!!' 메시지가 D1의 모니터에 뜨며 경보 신호가 울렸다. 위원장이 그 즉시 긴급 체포 버튼을 눌러 문 앞을 지키던 대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모두 놀라 귀를 막았다. '충격파?' 트위스트의 뇌리를 스쳐 가는 익숙한 소리. 그러나 곧 뒤이어 53의 몸에서 발생한 엄청난 섬광에 모두 눈앞이 하얗게 되어 앞을 볼 수도 없었다. T3D1과 스네일의 로봇들까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53은 몸속에 숨겨둔 검으로 순식간에 시니컬하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위원을 소멸시켰다. 이어, 그가 위원장을 향할 때 낌새를 알아차린 스네일이 급히 검을 꺼내 막아섰다. 그러나,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위원장을 향하던 53은 즉시 스네일을 베어들어 갔다. 스네일이 위험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 트위스트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의 구슬들이 동시에 공명을 일으켜 강력한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53의 검과 53이 동시에 강하게 튕겨 나갔다. 몇 초 후 트위스트가 간신히 명령했다.


"EMF 충격파야. T3!"


깨어난 T3는 즉시 EMF 충격파 상쇄 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섬광 때문에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의 상황은 이미 심각했다. 체포하려고 들어왔던 경호원 두 명과 위원회 건물 셔틀 주차장 길목에 배치되어 있던 여덟 명의 경호원이 모두 소멸되었다. 위원장이 다시 격상된 경보를 울려 연합군의 수비 대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53은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간 뒤였다. "성공" 그 사이, 트위스트의 렌즈에는 프카가 암호가 풀린 파일을 확보했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후, 바이러스, 53들] 뭔가 큰 비밀이 들어 있을 줄 기대했던 모두가 곧 실망하는데, 당시에는 이 짧은 메시지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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