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한 위원이 입을 뗐다. "놀랍군… 음… 놀라워. 53이 그렇게까지 인류와 결탁… 아니군… 과거의 53은 이미 소멸하였으니, 인류가 우리 셀의 센트럴도그마 시스템 (Central dogma, DNA -> RNA-> Protein 유전정보의 생성 순서 원리)을 조작해서 만든…" 다른 위원이 이어받는다. "로봇이지. 일종의 로봇으로 봐야 옳지요. 우리를 선택적으로 소멸시키기 위해 ‘인류’가 보내온 초고도의 자율성을 가진 ‘소멸 로봇’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소" 한 위원이 질문을 던진다. "그럼, 그 인류라는 존재가 우리를 어떻게든 소멸시키려고 하는데 우린 어떤 대비를 해야 하오?"
가만히 듣고 있던 위원장이 말했다. "우선 인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각자 돌아가서 깊이 고민해 보고 다음 시간에 논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우리 셀 연합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인 만큼 신중하고 건설적인 의견을 모아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겠지요. 오늘 회의에서 우리가 정해야 할 것은 '모자이크 프로젝트 소멸 사태'를 진정시켜서 시민들을 안심시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과, 53일당 아니면 생각보다 거대할 수 있는 53 조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거요. 일단 모자이크 도시에 관해서 트위스트 조사단장이 의견을 주시오"
대응 전략 영상을 업로드하면서 트위스트가 위원들을 보며 말했다. "현 상황에서는 정말 21이 조작에 직접 개입했는지를 확인하는 것과는 별개로 건설 현장과 위원회의 데이터 공유 과정에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어요. 어찌 됐든 시민 입장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지 않았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프로세스에서 부주의함에 따라 발생한 실책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비난과 힐책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영상을 띄우면서 말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현장과 위원회 간 ‘공유 데이터’ 위변조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시스템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해야 하고요. 둘째는, 현재 각 셀들의 모자이크 프로젝트 도시 시공 공정률에 따라 오토파지 방지 기준에 맞춰 철거 및 설계 변경을 해서 진행하도록 해당 보안국에 가이드를 전달하는 것이고. 음… 본 위원회에서 허가해 주신다면 우리 조사단에서 각 셀의 건설국 및 보안국과 함께 공정률 모니터링을 공동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더욱 직접적인 대응인데요. 셀 외곽에서 발생한 투명물질에 의한 파프소멸 사건을 계기로 최근 머시너리사에서 '물질 합성부'를 신설했는데, 우리 조사단에서는 리소좀 활성을 억제할 수 있는 물질 즉 리소좀 억제제(inhibitor) 합성을 요청할 예정이에요. 만약을 대비해 각 건설 현장에 비치해 두어서 유사시, 상황 발생 장소에 투하해서 오토파지를 신속 진압할 것입니다"
위원장이 답했다. "좋아요, 다른 위원분들 트위스트 단장의 의견에 특별한 반대나 질문 있습니까?" 한 위원이 질문했다. "앞의 두 가지는 당장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리소좀 억제제 개발은 시간이 걸리지 않소? 모자이크 프로젝트 기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요?" 트위스트가 답했다. "네, 이미 '물질 합성부'에서는 그 물질을 갖고 있어서요. 엄밀히 말씀드리면 개발이 아니고 합성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지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서가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량 생산 시스템이 아직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거든요. 위원님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셨는데, 어찌 됐든 기업에 의뢰하는 입장이라 가능하다는 답변을 기다려야 될 수 있어 자칫 늦어질까 우려도 됩니다"
다른 위원이 말했다. "지금 사안이 급하니, 우선 위원회에서 결의해서 리소좀 억제제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790,213셀에 있는 ‘셀 연합 산업혁신단지’에 별도 구축을 하시죠. 위원장님?" 또 다른 위원도 동의했다. "위원장님 그러시죠. 머시너리사도 지금 여러 가지 미션을 하느라 한곳에 집중하기는 힘들 겁니다. 우선 제조 공정 프로토콜을 확립하는 동안 짓는 게 어떨까요?" 위원장이 모니터에 이미 모두 찬성 버튼을 누른 것을 보고 말했다. "좋소, 과도한 공정이 진행된 모자이크 건설 쪽 인프라를 옮겨 바로 착공에 진행할 수게 하겠소. 트위스트 그럼 가능하겠죠?" "네, 감사합니다.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셔서"
이어, 한 위원이 물었다. "그럼, 시민들이 모자이크 도시 프로젝트에 대한 셀 연합회의 책임을 물을 텐데 이것은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시오? 위원장님?" "어차피 대규모로 일어난 사건이어서 자칫 숨기는 건 오히려 시민들에게 더 의구심만 가져다줄 수 있소. 누구의 소행이었건 우리 책임이요" 위원장이 큰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고 만약 책임 소지를 묻는다면 위원장 자리를 내놓을 것이오" 그의 결단에 모두 한동안 가만히 있자 스네일이 일어서서 다소 강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위원장님, 아니 재브(ZEB1, P37275), 그건 위험합니다. 자 보십시오. 과거 시민들의 셀 연합위원회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점차 산소부족 및 자원 고갈 등 환경도 나빠지고 M1 또한 자주 출몰해서 시민들의 불안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게다가 모두 인지하고 있다시피, '셀 이탈 방지 위원회가' 구성된 후에 일련의 여러 소멸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시민들의 불안과 불만이 불신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번 53 테러 사건으로 인해 상상력이 난무하는 다양한 억측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만약 위원장님이 그저 사태 책임을 인정하고 물러나기만 한다면 시민들의 연합 위원회에 대한 '저항'으로 바뀌는 촉발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53 혹은 '인류'가 바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내부 전쟁으로 이어져 셀 자멸(apoptosis)의 길로 들어설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책임지고 물러나실 때가 아니고 시민들에게 '길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스네일의 발언에 다른 위원들도 동조했다. 사실상, 그나마 가장 신뢰도가 높은 재브가 물러나면 대신 중책을 맡아 지휘할 적정한 리더가 부재한 것도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점점 나빠질 상황에 희생양으로 될 수도 있는 그 자리를 선뜻 취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던 속내도 있었다. 한 위원이 화제를 바꾸어 발언한다. "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자이크 도시 붕괴로 인한 셀 자멸 유도 계획이 수포가 된다는 게 확실해지면 53과 21은 또 다른 방법의 테러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봅니다. 또, 그 '인류'가 53의 형광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중입자포 유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도 있고" 다른 위원이 이어 말한다. "그럼, 분명 다음 단계를 실행할 거요. 그 '인류'들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위원장 재브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때, 트위스트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로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이주 시범 프로젝트"
첫 번째 EX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로 찾은 곳, 즉 스네일들이 다녀온 그곳은 자원이 풍부한데 특히 칼슘과 인이 풍부했다. 그것들이 합쳐져서 크리스털 형태로 매트릭스에 넓게 박혀있었다. 하얗고 두껍게 넓게 펼쳐진 긴 터널 같은 그곳에는 다른 영양분도 넘쳐났다. 그래서 아주 작은 셀들이 터널 안쪽 곳곳에 붙어서 자가 증식(self renewal)하다가 있다가 어떤 신호를 받으면 터널 밖으로 나간다. 시간이 부족해 그들을 뒤쫓아 가보진 못했는데 상황에 따라 다른 세포로 분화(differentiation)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왜냐하면, 조사를 오가는 도중에는 우주 속에서 그렇게 자그마한 셀들은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몇 차례 다녀온 프로젝트 리포트에 의하면 M1과 같은 눈이 여러 개 달린 듯 괴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셔틀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쓰고 대신 터널 바깥쪽에 빨판으로 붙어서 강한 산으로 매트릭스를 녹인 후엔 등 위쪽 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칼슘과 인을 뿜어낸다고 했다. 에너지 낙원이 따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포근하고 따뜻한 엄마의 느낌을 따라 그곳을 둥지(Niche)라고 불렀고 코드명은 앞 글자를 따 'N'이라고 정했다. 당연히 장점만 있을 수 없는데 단단한 지반 구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면, 확장하기가 힘들어서 곳곳에 콜로니처럼 작은 도시들을 세우는 비교적 비효율적인 건설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새로운 연합회의 모습을 갖출 수가 있는 단점도 존재한다.
반면, 이번 EX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의 리포트와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히프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산소가 풍부한 그곳은 쉽게 찾아가긴 어렵지만, 일단 도착하면 마치 자연에서 가장 신선한 공기만을 필터 한 듯한 최고 품질의 산소 환경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크고 작은 다양한 자연 터널들이 그물망처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정착 후에는 단번에 큰 왕국까지의 건설을 고려할 수 있으며, 영양분의 공급도 N만큼은 아니지만 특유의 터널 네트워크가 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다. 특히 매우 말랑말랑한 지반은 어떤 형태의 도시도 창조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이 가볍다 혹은 밝다(Light)는 뜻의 'L'을 지역 코드명으로 정했다. L의 가장 큰 장점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적은 청정지역이라는 것이다. M1 등이 아예 없을 것이다. 사실 한번 다녀온 곳이어서 N의 정보만큼의 신뢰도가 높진 않지만, 기대도 만큼은 다른 어떤 곳보다 월등하다. 문제는 그저 우주의 흐름을 타고 가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터널이 연결되어 있기에 언젠가는 도착하겠지만 가다가 너무 오래 걸려 셀 스스로 자멸하는 (apoptosis) 위험도 있고 만약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대규모의 셀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단점도 무시할 수 없는 포인트이다.
N과 L. 그 어느 곳도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계속 의견의 분분한 가운데, 이번 시범 프로젝트의 N과 L의 리더들이 뽑혔는데 'N 이주'는 전 영웅이자 셀 이탈 방지 위원회였던 키스(KISS1, Q15726)가, 'L 이주'는 이번 EX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에서 히프의 팀장이었던 안트(ARNT, P27540)가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키스는 200개의 사단과 400개의 정착용 전함, 그리고 안트는 50개의 사단과 100개의 정착용 전함을 지휘한다. 시범사업인 만큼, 전체 예상 이동의 약 1%만 진행하는 것이고 특별히 지원자들로만 구성하였다. 예상외로 많은 이들이 자원했는데, 그만큼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는 의미이고 또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으로 보인다. 백 가지 넘는 위험 요소 항목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모두 동의' 한 번의 클릭으로 동의서를 제출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하니 오히려 걱정된다.
"성공할 수 있을까?" 트위스트의 걱정에 "이제 M2를 이용해 매트릭스를 분해하는 기술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라며 스네일이 답한다. "너무 기대 심리가 높아서 걱정이야. 이제 시범사업인데. 불안정한 상황에 대한 돌파구로 제안하긴 했지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 "하긴, 아직 완벽한 계획도 아닌데 너무 몰아붙이는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해. 그렇다 해도, 자원자들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만큼 자기도 너무 큰 책임감을 느끼지 마. 셀 연합 위원회에서도 최근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위원장명으로 각 셀에서는 ‘이주’를 부추기는 뉘앙스는 자제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리스크가 큰 사업임을 충분히 설명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니까"
트위스트와 스네일은 늘 함께 걷던 그 장소에서 함께 산책하고 있다.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몇 줄기들의 빛이 이들을 따뜻하게 비춘다. "스네일 이거 봐봐. 시간이 꽤 걸렸지만, 힉스가 휴대용 에너지보드 만들어줬어" "오, 성공했구나! 팀프가 좋아하겠어" "자, 자기 거랑 자기 로봇들 꺼도 받아왔어" 나란히 벨트에 장착했다. 그러면서, 스네일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즘엔 53이나 21의 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이상해. 그렇지?" "응, 바드, 팀프 와 피드들도 별 이상한 동향이 없다고 해서 추정하기론 아주 먼 지역으로 간 것이 아닌가 해"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이에게나 해당한다. 트위스트가 말했다. "뭐, 이제 주피터급 오믹스함도 완성되었으니까 좀 더 영역을 넓혀 조사해야겠어. 모자이크 도시 프로젝트도 어느 정도 안정화 되어가는 것 같고" "그래, 나도 어느 정도 사령부의 규모가 꽤 갖춰져서 아예 53-21 전담 특별 조사 추적팀을 만들까 했어. 일단 시범 프로젝트 진행 상황 봐가면서 같이 고민해 봐" 트위스트는 같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스네일에게 지난번 569,801셀에서 위험천만 한순간에 겪었던 신기한 경험 '나도 아니면서 나인 존재와의 대화'에 대해 들려줬다.
그 시각, 21은 사실 고민에 빠져있었다. 53이 셀 연합위원회에서 빠져나온 뒤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예의 그 날카롭고 지적인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갑자기 무딘 칼이 된 걸까? 스네일과 트위스트의 구슬 실드에 튕겨 나며 다친 거라고 들었지만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는 느낌이 든다. 모자이크 도시 방해 계획도 겨우 일 단계에서 멈췄다. 그냥 시간만 조금 번 셈이 되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일단은 별도로 몰래 준비하는 프로젝트나 박차를 가하자는 마음을 먹는다. 그 역시 지금 모시고 있는 53이 인류가 심은 유전자 변형체임을 알 리가 없고, 형광 단백체가 떨어져 나가서 인류의 입장에서 큰 쓸모가 없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 셀 연합회 우주국 관제센터-
"모든 채널 열어두고, 이제 카운트다운 시작한다. 10, 9… N 발진!, 10, 9… L 발진!!" 이제 '이주'를 위한 본격적인 첫걸음이 내디뎌졌다. 모든 셀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