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요?" "음… 됐어, 됐어… 원래대로"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가. 그의 모습에 어째서 이렇게 젊은 친구가 최고의 스파이라고 불렸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스네일의 작전참모가 말했다. "록스 (LOXL2, Q9 Y4 K0)라고 했지? 좋아, 허락하지. 필요한 거 있음 뭐든 요청해"
록스, 그는 원래 53이 스네일의 기지에 보낸 언더커버였다. 그쪽 세계에서는 그만의 특별한 벨트 장치 기술 때문에 현역 중 가장 뛰어난 스파이 중 한 명으로 부각되었다. 바로 '복제'. 벨트 내장 인공지능 단백질 디자인 장치는 그가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트키스러운 기술은 상대의 코드만 알면 즉시 록스의 모습을 상대와 똑같이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은어로 '복붙 (복사해서 붙여넣기)'이라고 하는 그의 주특기이다. 그런 그도, 2023 할루시네이션 전투의 실상을 확인한 후 21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지난번 스네일 등이 시도했던 이중첩자를 찾아내 직접 소멸시킨 게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7,584,623셀 기지에 언더커버들이 일부러 집단 감금되었을 때, 서로 친밀한 그룹을 파악해 그 들 사이에 빈틈이 있을 때마다 그 자리에 없는 이로 변신해서 결국 이중 첩자를 찾아낸 것이다. 배신자 21을 소멸시켜 죄를 씻겠다.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스네일의 작전참모는 자신을 복제하는 모습에 바로 그를 낙점했다. 이제 딤프등과 함께 협업을 통해 21을 추적 소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센스와 전투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혼자 활동하기를 좋아하는 그가 이번 미션에 최적임엔 분명하다. 단, 작전참모의 렌즈와 그의 렌즈를 동기화시켜 모든 작전 수행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그래도 스파이였으니까. 흔쾌히 동의한 록스에게 21의 위치와 동선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완전 기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록스가 스네일 기지에서 탈출한 것으로 꾸몄다. 록스 역시 21의 수하 중 자신의 조력자가 될 만한 이가 있었기 때문에 21이 있는 빌딩 지하 창고까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숨어 들어갔다. 이제부터 스스로 21의 오피스를 찾아내어 내일 있을 열병식 전에 21을 소멸시키면 된다. 복수를 함과 동시에 비 셀연합과 53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록스는 우선 경호원 한 명을 잠재워 창고에 가둬두고, 그로 변신해 복도를 다니며 21의 오피스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비밀 문이 있는 듯한 방을 찾아 들어가 벽을 더듬으며 비밀 출입구를 찾으려는 순간 여럿이 조심스럽게 방 쪽으로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벽 뒤 비밀 문이 열려 잽싸게 들어가 숨어서 문 뒤편에 딱 붙어 있었다. '벌써 가둬 둔 경호원이 발견됐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이거 재밌는데. 이렇게 스파이 놀이하니까 신난다" "2번 조용히 해, 아직 들키면 안 돼" "뭐 어때, 들키면 바로 보내버리면 되지" "저 4번은 막무가내라니까. 그럼, 재미가 없잖아. 크크" "5, 6, 7 너희들은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계속 속삭이듯, 그렇지만 마치 들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저놈들은 뭐지' 록스는 궁금했지만, 인원수가 많은 듯 불리하니 일단 가만히 있는다. 그중에 한 명이 록스가 있는 벽 근처로 와서 더듬으며 말한다. "여기에도 방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여기서 숨을까?" 하며 비밀 문을 열려고 한다.
록스는 우선 근처에 세워져 있는 검을 비밀 문에 비스듬히 걸어 열지 못하게 한 다음 만약을 대비해 바로 옆 동상 뒤로 돌아가 플라스마건을 벽 쪽에 겨눴다. "덜컹… 덜컹…" 그가 문을 열려고 힘을 힘껏 주려는 순간, "3번 가서 7번 데려와, 뭐 하러 깊이 숨어? 멍청이냐?" 7번인 듯한 자가 말한다. "뭐, 멍청이? 너 오늘 한번 갈래?" 그때 퍽퍽 소리가 나더니, "2번 7번 너희 둘 다 한 번만 더 싸우면 그 자리에서 둘 다 소멸시킨다" 대장인 듯한 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방금 21이 병원에 있는 53을 소멸시켰다. 이제 곧 21이 자신의 오피스에 도착할 거다. 얼른 그를 만나고 내일 일을 준비하자. 자, 조용히 따라와" 모두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록스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저들은 누구이고 또 21이 53을 소멸시켰다는 얘기는 무슨 말이지? 내가 여기에 숨은 걸 알고 유인하기 위한 쇼인가? 렌즈를 통해 작전참모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화 내용, 내부인 아님" 대화 수준을 봐서 그건 안 가르쳐 줘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뭐 하는 자들일까? 조심스럽게 비밀 문을 열고 예의 경호원 모습으로 모른 척 조심스럽게 그들의 그림자를 뒤쫓아 따라갔다. 복도 벽 가운데 멈춰 서서 무언가를 하자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갔다. 위치를 확인 후 록스는 복도 천장을 통해 기어가서 그 방 위의 환기구까지 도달했다. 틈 사이로 21! 21이 보인다. 그런데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너, 너희 들은? 아, 아니 53?" "어이, 반가워 21. 우린 처음이지? 아닌가? 크크크" "무… 무슨… 일이지… ?" "그런 것까진 알 것 없고 어차피 소멸될 건데, 아무튼 우리 대신 일을 해줘서 고맙다. 너 사단 병력 많이 모아놨더라?" 다른 이가 말했다. "그런데 너 병원에 잘 있는 우리 53은 왜 소멸시켰지?" "뭘 물어봐? 저놈 욕심 때문이지. 바쁘다 얼른 일하자" 말이 떨어지자마자 21이 튀어 오르듯이 데스크 뒤로 가서 플라스마 건을 뽑아 들고 그들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그들은 순식간에 흩어져서 피하고 그중에 한 명이 21의 건을 뺏고 다른 한 명이 허리춤에 있는 단검으로 21을 그 자리에서 소멸시켰다. 록스는 그 광경을 보고 순간 기절할 뻔했다. 21의 플라스마 건에서 뿜어 나오는 빛들이 비친 그들의 얼굴이 모두 53이었다. 아니 53'들'이었다! 복붙 록스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를 본 것이다. 록스 렌즈가 전송하는 실시간 영상으로 이를 지켜보던 작전 참모는 놀라서 일어서다 부딪혀 책상 위의 물건들을 와르르 쏟았다. 스네일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참았다. 아직 저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중 대장인 듯한 이가 말한다. "이제 자연형 (Wild type) 53도 없고 21도 소멸됐으니까, 내일부터 각자 역할을 잘해. 나중에 나머지 친구들도 불러야 하니까 그때까진 조심해" "오케이, 난 내일 열병식 때 뭐 이것저것 받고 그냥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 3번 너는 '21 복제 로봇' 준비해 둬. 자연스러운 걸로. 내일만, 잘 넘기자" 그들은 아무 일 없듯이 조용히 나갔다. 움직임이나 말투로 봐서는 무시무시 한 놈들인데 얼굴이 모두 53이다. 작전참모의 메시지가 왔다. '21 소멸 증거물 확보' '평소 알고 있는 53이 전혀 아닌데. 성격이나 지성이 이상하리만치 차이가 나. 혹시 나처럼 모두 복제한 건가? 우선, 증거물이나 챙기자' 일단 록스는 천장에서 조용히 내려와 21의 벨트와 구슬을 집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돌연변이 53 하나가 들어왔다.
"어? 내가 챙기려고 했는데, 너 누구니?" 록스는 귀신을 본 듯 놀라며 그만 벨트와 구슬을 놓치고 그대로 53을 밀치면서 달아났다. 작전 참모는, 또 책상을 엎었다. "경비원 한 놈이 우리 보고 달아났어. 어떻게 하지?" "7번이 쫓아갔으니까, 나머지는 그만 가자. 여럿이 있는 모습 안 좋아. 벨트랑 구슬도 챙기고" 록스는, 엄청난 속도로 검을 들고 따라오는 7번을 떼어 놓기가 어려웠다. 코너를 끼고돌 때 거의 따라 잡히려는 순간 21의 비서관들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경례했다. 비서관이 물었다. "응, 이상 없어? 21님 오피스 복도 쪽에서 무슨 시끄러운 소리가 났는데?" "네, 확인해 보니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하고 지나가고 있는데, "앗 53님! 안녕하십니까?" 어느새 뒤 쪽에 바짝 붙어오던 7번을 본 비서관들이 인사했다. 7번도 순간 당황해서 인사를 정중히 받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록스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의 등 뒤로 "병원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내일 열병식 때문에 오신 건가요?… 어쩌고…"가 들렸다. 작전참모는 그제야, 자신이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열병식이 열릴 때, 21 모형 로봇임을 확인한 록스의 렌즈 영상을 보고 작전참모는 스네일에게 '21 소멸, 추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어, 록스는 근처의 한 빌딩으로 들어갔다. 어제 경호원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다시 7번을 자연스럽게 뒤따라간 것이다. 역시 천장을 통해 그들이 있던 방을 찾아가 탁자 위에 놓인 벨트를 들고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7번 거기서 뭐 해?"
"응, 아니야 어제처럼 천장에 누가 있나 본 거야"
"열병식 끝나기 전에 가야 하니까 나와. 이 멍청아"
"그래, 알았다" 하며 슬그머니 내려와서 나가려는데 그자가 또 부른다. 뭐지? 들켰나? 손을 슬그머니 벨트의 프라스마건 쪽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왜?" "멍청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왜 화를 안 내?"
크, 어제 그놈이군. 록스는 손을 내리며 말했다.
"2번, 너 1번한테 소멸되고 싶냐? 지금 불러?" "아… 아니야, 농담이지 크크. 빨리 가자"
록스는 그를 뒤따라가는 척 몰래 챙긴 벨트를 가지고 빠져나왔다. 어제 그 마주친 짧은 순간에 록스는 프로답게 '53-7 코드'를 따둔 것이다. 작전참모는 스네일에게 '21 소멸, 확정'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현장의 21은 로봇임을 밝힌 뒤엔 영양제 한 통을 몽땅 털어먹고는 쓰러졌다.
- 스네일의 비밀기지-
"정말 특별한 능력이군요. 록스 씨" 53-7로 변신한 그를 스캔하며 트위스트가 말했다. 알려진 53의 3차원 구조나 즉 벨트의 모양(기능이 있는 도메인)이 달랐다. 돌연변이(Mutation)이다. 그런데 활성 에너지가 아주 높은 고활성(hyper activity) 형태이다. 렌즈의 영상 기록이나 록스의 복제 정보로 비추었을 때 '인류'가 기존의 정상적인 53유도작전 보다 더 강한 '대량의 고활성 53'을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영상 데이터에 비친 7개의 53 돌연변이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부위의 활성도를 높여놓은 듯하다. 록스의 진술과 실제 녹화 내용을 보면 얼핏 모자라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엄청난 개별 전투력을 갖고 있고 특히 공격 성향이 뚜렷했는데, 1번으로 보이는 자는 그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점잖고 또 전략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류'는 어떻게 저 다양한 종류의 ‘53들’을 보냈을까? 다행히, 21의 소멸은 셀 연합측면에서 첩보활동에 굉장히 용이한 상황이 되었다. 저 53들은 그다지 첩보전에는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고 비 연합셀들의 사령부와 군대의 장악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이 발생했다. 북서부 극지방에 53이 있는 것 같다는 첩보를 받고 출동한 록스의 기지와 팀프들의 노력으로 돌연변이 53 한 명을 생포했는데 그는 록스가 마주쳤던 53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게다가 트위스트의 지휘로 그의 기원 조사와 단백질 시퀀싱(서열 분석)을 통해 그들은 GFP 같은 형광단백질 대신 아주 짧은 특이 서열들만 갖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북서부 극지방셀을 추가조사하던 팀프들에 의해 더 놀라운 게 발견되었는데, 동굴 속에는 합성되다가 멈춘 것 같은 수많은 53들의 조각들이 있었다! 스네일과 트위스트가 같이 현장을 확인 후 그 셀의 수용체 관측소를 찾아갔다.
담당자의 고백에 가까운 진술을 통해 인류가 '바이러스'를 이용해 공격형 돌연변이 53의 유전자들을 셀에 대량으로 심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생포한 53의 코드가 '53-761009'인 이유인 것이다. 저 돌연변이 53들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인류는 셀연합과 비 셀연합 간의 전쟁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셀 전체의 사멸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의 소멸로 시간을 번 쪽은 오히려 '인류'였다. 53이 그렇게 되찾으려고 애쓴 '특 일급문서 블록체인 박스' 에 담긴 메시지 [최후, 바이러스, 53들]가 바로 이것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트위스트는 위원회에 이를 보고한 뒤, 머시너리 사의 로봇 생산부를 확대하고 790,213셀 연합혁신도시 ‘물질 합성’ 공장을 증축해서 풀가동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제 D-day 3일이다. 그동안 셀 연합위원회에서는 N과 L로 이주할 시민들을 분류하고 셀 호위용 사단들과 정착용 함대들을 점검했다. 새 콜로니의 위원장 후보인 재브는 스네일 부대 등을 따라 N으로, L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히프는 트위스트, 프카 및 피드 등과 함께 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트위스트는 히프에게 그간 말하지 못했던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페론과 팀프등의 노장들은 젊은 세대들을 위해 셀에 남아 이들의 탈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베타, 그녀 역시 친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남길 원했다. "난, 여기 이곳의 셀과 함께할래"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주' 시나리오에서 가장 걸림돌은 역시 '이탈'이었다. 저 두터운 매트릭스를 뚫기 위해 M2를 무한정 불러낼 수 없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거대한 M2 들과 대규모로 이탈한 셀들이 서로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환할 수 있는 M2의 수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고활성 돌연변이 53들이 노골적으로 장악한 비 셀연합이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전 함대의 플라스마 포를 메트릭스 탈출에 쓸 수도 없다. 급할수록 문제는 하나씩 해결하는 게 제일 낫다. 그래서 트위스트와 스네일은 '완벽한 무력화'를 뜻하는 코드명 'C-NUT (complete neutralization)' 작전을 바로 수행하기로 했다 (NUT은 볼트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너트의 의미). 그리고 트위스트는 주피터함과 셀 연합회 보유 스파이더들을 총동원 수천 대의 스파이더들에 ‘특수 장치’를 달아서 이탈할 위치의 매트릭스 속에 광범위하게 펼쳐 숨겨두었다. D-Day, 새벽. 비 셀연합회 셀의 곳곳의 빌딩에서 튜브 딜리버리를 통해 'MDM2-Chem'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미니 로봇들이 쏟아져 나와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