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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저자 Apr 06. 2022

가을호 두번째 이야기,"담배와 사슬, 그 사이"

1.

 T는 옷장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옷을 고르냐에 따라 오늘의 온도는 달라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카디건을 입고 그 위에 얇은 코트를 입을지, 터틀넥 하나를 입고 나갈지 가늠하기는 매년 가을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기에 매번 고민 하게 된다. 그런 고민을 끝낸 건 S의 전화다. 

 “어디야. 출발도 안한 건 아니지?”  

  T는 금방 도착한다고 대답하며 아무 옷이나 쥐어든다. 엘레베이터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보니 영 시원찮아 다시 갈아입을까 고민을 또다시 잠깐 해보지만, 거의 다 와간다는 택시의 알림에 고민을 접어둔다.   


 2.

 간만에 오게 된 학교 앞 번화가는 길만 그대로일 뿐, 이정표가 되어주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낯선 간판들만 가득한 탓에 T는 익숙한 낯설음을 느꼈다. 지도 어플에 S가 알려준 가게 이름을 검색해보지만 타지에 있는 가게들만 뜨는 바람에 결국 다시 S에게 전화를 건다. 

 “야, 그 가게 이름이 뭐라고?” 

 “관계라니까.”

 “아니, 그렇게 검색해도 안 뜨니까 그러지. 관계, 여이 맞아?”

 “어, 그거 맞는데, 여기 양말가게 옆에 있는 빽다방 반대편이야. 아, 아니다. 스타벅스 사거리에서 예전에 분식점 있던 그 골목으로 들어오면 있어. 어딘지 알겠지?”  

 떠듬떠듬 기억을 되살려 골목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술집이 보인다. 종종 갔던 카페가 시끌벅적한 펍으로 변해있었다. 인테리어는 거의 그대로인데 작게 써 있던 ‘Being’ 간판은 사라지고 네온사인으로 ‘RELATION’이 크게 박혀있다.  


 3. 

 술집을 꽉 채운 노랫소리에 반쯤 악을 지르며 S, C와 인사를 나눈다. 가게 이름을 누가 이렇게 알려 주냐 따지려던 생각이었으나 이 노랫소리를 뚫고 따지기는 귀찮다는 계산에 T는 S가 틀린 말은 안했으니 관두자고 생각한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꽤나 붙어 다녔지만 졸업을 앞두고부터 셋은 각기 다른 방향을 택한 탓에 자주 보지 못하기 시작했다. S는 술집이나 카페를 운영할 계획이라며 분주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C는 9급 공무원을 하겠다며 독서실로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졸업하고 오 년이 지난 이제는, 보통 갑작스런 S의 연락에 일 년에 한 두 번 쯤 오늘처럼 모이곤 한다.   


 4. 

 노랫소리에 묻혀 영 안 들리는 말소리에 불편한 T는 다른 곳에 가자며 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S는 찰랑거리는 트렌치코트는 손에 든 채 얇은 니트 한 벌을, C는 청바지에 푹신해보이는 회색빛 패딩을 입고 나왔다. T는 그 둘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관계’ 옆에서 담배를 피며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 어느 순간 이야기는 뚝 끊겼고, 어깨 너머로 스피커의 둔탁한 소리만 들려오는 찰나, T가 문득 질문을 던진다.  

 “관계가 뭐냐?” 

 목적지를 헷갈리게 만든 S를 향한 뒤끝도 없지 않아 있는 질문이다. S는 피식거리며 대답한다. 

 “인생의 진리지. 섹스.”  

 웃고 있는 건 S뿐이다. 머쓱해진 S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말을 바꾼다.  

 “담배 같은 거지. 이걸 딱 불을 붙여. 불이 확 붙었다가 천천히 잎을 태우거든, 그럼 그걸 물고 빨고 즐기는 거지. 근데 즐긴다고 정신없이 빨다보면 담뱃잎은 다 타버려서 필터를 태우게 된다고. 그게 뭐하는 거냐. 필터까지 태우지 말고 깔끔하게 잎만 태우고 버려야해. 깔끔하게.”  

 S는 그저께 만난 여자를 떠올린다. 짧은 치마와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가죽 부츠가 잘 어울리던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치마와 부츠 사이 보이는 하얀 허벅지가 예뻤다.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그녀와 한 침대를 쓰게 되고,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아침에 다시 봐도 괜찮은 여자였고, 헤어질 때까지 유쾌했다. 오늘 그 여자에게서 저녁 먹었냐는 연락이 왔지만 S는 태울 수 있는 잎이 얼마나 남았는지 재보느라 여직 답장을 하지 않았다. 

 C는 건너편 주차장 입구에 놓인 쇠사슬을 보며 S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버릴 수 있으면 좋지. 근데 어떤 관계는 저기 있는 쇠사슬 같은 거라 그게 안 되는 거지. 쟤네는 그냥 저렇게 묶여서 나온 거야. 내 손가락만한 굵기만 되도 어떻게 하는 게 힘들어. 근데 인간은 저 사슬보다 한참 크지 않냐. 그러니까 어쩌겠어. 묶여버린 거 그냥 같이 살아가는 거지.”  

 C는 좀 전에 자신의 잔고에서 빠져나간 10만원을 생각한다. C의 어머니는 달에 두 세 번은 자질구레한 핑계를 대며 돈을 받아간다. 이주 전에는 동네술집에 아버지의 외상값이 쌓여있더라는 거였고, 이번에는 안경을 깔고 자버린 탓에 부서져 하나 맞춰야한다는 거였다. 집에 보내다주는 생활비와 별개로 그렇게 종종 빠져나가는 돈도 정기적인 걸로는 월세와 보험금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그만한 돈은 있으니 가져다 쓰라는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는 거짓말인지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쪽이든 별 생각이 없다. 가끔 학자금과 보증금에 쓰인 대출 내역을 조회해볼 때마다 그런 생각들은 순서대로 번갈아갔다.  

 “아. 다 됐고 이차는 어디 가냐. 그게 문제지.”  

 답답해진 C의 새로운 물음에 마찬가지로 착잡해 보이던 S는 분주히 다음에 갈 술집 후보군을 읊는다. 관계에 빗댈만한 물건을 찾으려 주위를 살피던 T도 다음 목적지를 찾기 위함으로 그 목적으로 바꾸며 T의 질문은 끝이 난다.   


 5. 

 커튼 사이로 햇빛이 살랑거린다. T는 여유로운 풍경에 흠칫 놀라며 시간을 확인하려다 어제가 금요일이었다는 기억으로 다시 잠에 들려 한다. 한 번 깬 잠은 오지 않고,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따스한 이불 뭉치에 파묻혀 기억을 더욱 되살려 본다. S는 누군가와 연락하더니 먼저 자리를 떴고, C는 안경 하나 더 맞춘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2차를 결제했다. 그리고 나머지를 떠올리려다 동생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나가본다. 

 이번 생일 선물로 사준 컴퓨터 부품들이 도착해 신이 난 동생은 그것들을 조립하고 있다. 고등학생인 동생이 어떻게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고 정리하는 지 신기할 따름에 옆에 앉아 멍하니 보다보니, 어느새 조립을 끝내고 선을 정리하고 있다. 그 옆에서 손이 심심해 케이블 타이를 가지고 놀아본다. 구멍에 그 끝을 넣고 한 번에 슥 당겨보니 드르륵 거리며 감기는 손맛이 있다. 그렇게 끝까지 당기고 나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 아무 것도 감지 못한 케이블 타이는 쓸모가 없다. 다시 새로운 케이블 타이를 꺼내든다. 이번엔 천천히 한 칸씩 감으며 진동을 느껴본다. 끝에 다가가서 참지 못하고 또 드르륵 감아버린다.  

 ‘그 애라면 관계는 케이블타이 같다고 하지 않았을까. 가까워지다 보면 그 관계의 사이에서 나 자신의 공간이 부족해져 답답해질 때가 있다. 다시 그 사이를 늘리려고 애써도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결국 더욱 가까워져 그 끝을 보고 버려지던가, 늘려지지 않으니 자르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T는 이전의 연인을 떠올린다. 그를 이해하려다보니 자신이 어느새 그가 된 것 같이 생각하게만 되던 때가 있었다. 그의 삶에 자신이 너무 큰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렵다는 그는 종종 이유 없이 찾아오는 우울을 이유로 T를 밀어내기도, 어떨 때는 마구 잡아당기기도 했다. T가 할 수 있는 것은 밀려나지도 당겨지지도 않으며 그저 천천히 다가가는 것 뿐 이었다.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형, 케이블 타이를 다 못쓰게 만들면 어떡해. 안에 뭘 넣고 당겨서 묶던가 해야지. 저건 다 버려야겠네.” 

 “그러게, 뭐라도 끼워서 당길 걸 그랬다.”  

 T는 갖고 논 케이블 타이를 다 버리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T는 되뇐다. 오늘은 갈색 스웨이드 자켓에 검은 니트를 입어야겠다고. 그리고 약속을 잡아봐야겠다고. 그리고 기회가 되면 사라진 그 카페가 어딘가에 이전했는지도 확인해봐야겠다고.      


from.고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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