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다섯번째 주제 : free(자유주제)
세번째 이야기, 다리 위의 사담 (上)에 이어서 보시길 바랍니다.
#3
무대 한쪽 편에 한 남자의 영정사진이 걸려있다.
진화가 상복을 입은 채로 무대 뒤쪽에서 등장해서 관객을 바라본다.
진화 머리 위에 스포트라이트.
진화: (독백) 그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주변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던 무렵에 제게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첫 만남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몹시 추운 겨울이었어요. 집으로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며 언 몸을 녹이고자 주변에 서점으로 들어갔죠. 매년 이맘때면 등장하는 ‘올해를 잘 보내기 위한 질문리스트’와 같은 책을 둘러보려고 했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딱 한 권 남았더라고요. 그렇게 그 책을 집어 드는데, 뒤에서 그가 등장했죠.
무대 왼쪽에서 ‘그’ 등장, 스포트라이트. 진화와 ‘그’는 서로 거리가 떨어진 채 연기를 이어나간다.
그: 저기요. 이 책 사실 거에요?
진화: 네?
그: 그 책이요. 사실 거냐고요.
진화: 아...네. 살 건데요?
그: 혹시 그 책 저한테 양보하시면 안 돼요?
진화: 네? 왜요?
그: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저 그 책 사려고 지금 서점 세 번째 들리는 거거든요. 다른 서점들은 이미 재고가 없고, 여기 딱 하나 있길래 달려왔는데, 보시다시피 그쪽 손에 들려있네요. 제가 그 책을 좀 특별하게 여겨서요. 혹시 이거 매년 나오는 건 아세요?
진화: 네. 저도 매년 사는데요?
그: 그러시구나. (잠시 고민하다가). 아!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그 책은 그쪽이 사고요. 한 번씩 거기 적힌 질문들을 저한테 대답해주세요. 제가 질문하는 걸 조금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려고 매년 그 책을 사거든요. 사람들 생각 듣는 걸 좋아해서요. 책을 가져가는 대신, 생각을 나눠주는 거죠. 어때요?
‘그’. 암전.
진화: (독백, 관객을 바라보며) 저는 잠깐 고민을 하다 알겠다고 답했어요. 그렇게 그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질문과 대답을 하기 위해 만나기 시작했죠. 대답하는 입장이 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늘 제가 물었고, 제가 듣길 원했으니까요. 근데, 떠올려보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은 많이 들었지만, 제 스스로의 생각은 잘 몰랐더라고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죠. 그에게 대답하면서 저의 새로운 부분을 많이 발견했어요. 가령, 로맨스 영화만 보던 제가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던가, 제가 비혼주의자에 가깝다는 사실 같은 거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그에게 같은 질문을 물어보기 시작했어요. 항상 질문만 할 그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길 바랐거든요. 우리는 만나면 같은 질문을 물었고, 다른 대답을 들었죠. 그렇게 점점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고, 우리는 곧 사랑을 시작했어요. 우리의 사랑은 혀로 하는 사랑에 가까웠죠. 하루는 그가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 스포트라이트.
그: 진화 씨에게 가장 소중한 건 무엇이에요?
진화: 소중한 거요? 흠, 글쎄요. 이렇게 대화 나누는 시간?
그: 시간! 저도 그래요. 제게 꼭 소중한 시간이 두 개 있는데요, 하나는 진화 씨랑 대화하는 시간이고요. (지갑 속 사진을 보여주며) 다른 하나는 이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이에요. 진화씨. 얘는 저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예요. 제가 정말 진화 씨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데,
진화: (말을 끊으며) 알아요. 알아. 항상 함께 다닌다는 그 친구요? 그렇게 대화가 잘 통한다면서요.
그: 잘 통하다 뿐이에요? 저랑 마음이 꼭 잘 맞는 친구예요. 우리 둘이 대화를 시작하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저번에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글쎄, 반나절 동안 얘기를 했다니까요. 믿어지세요? 밥도 안 먹으면서 얘기를 이어가는데, 제가 ‘천국은 없다.’라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 순간! 배가 엄청 크게 ‘꼬르륵’하고 울리더라고요. 그때서야 우리가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걸 깨달았죠. 아마 진화 씨와 같이 만난다면, 또 그렇게 밤새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진화 씨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인 줄 알았어요. 진화 씨를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우리 꼭 같이 보는 거예요.
‘그’ 암전.
진화: (독백) 그는 늘 그 친구의 얘기를 꺼냈어요. 함께 만났으면 좋겠다고. 저와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그 친구와 함께 다녔죠. 그는 말했어요. 그 친구는 자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심지어는 나에게도 말하지 못할 약점들까지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했죠. 나는 내심 서운한 티를 내면서도, 그런 상대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서 그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점이 반갑고 고마웠어요.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죠. 그러던 중,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음향. 전화벨 소리.
‘그’ 스포트라이트.
무릎을 꿇고 울면서 전화를 받고 있다.
진화: (전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그: (흐느낀다.)
진화: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요?
그: (여전히 흐느끼면서) 진화 씨. 진화 씨..
진화: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그: 친구가요. 그 친구가요...
진화: 진정해요. 진정하고 말해 봐요. 아니, 제가 지금 거기로 갈게요. 어디에요?
잠시 암전.
불이 켜지면, 진화와 ‘그’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 마치 어떤 벽이 있는 것처럼 진화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허공을 본다.
그: (진정된 상태로 서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예전에요. 그 친구랑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제가 물어봤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공유해보자고. 그 친구는 고민하더니, 자신에게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고 말했어요. 누군지는 말해주지 못하지만 곧 알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죠. 그리고 나선 저는 제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제게는 아주 오랫동안 앓고 있던 정신병이 있었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병이었어요. 저는 자주 현실을 꿈으로, 꿈을 현실로 착각하곤 했죠. 가상의 세계와 진짜 세계의 구분이 사라진다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어요. 한번은 꿈이라 착각하고 삼층 높이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죠. 그래도 약을 먹으면 괜찮았어요. 꾸준히 약을 먹으면 괜찮다고,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했었죠. 그러고 그냥 잊고 살았어요. 그 말을 했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런데요, 어제 참 희한한 꿈을 꿨어요. 친구가 제 방에 찾아왔어요. 맛있는 음식과 와인, 파티용품을 잔뜩 사 들고 왔죠. 조용한 성격의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꿈이니까. 꿈이니까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죠.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요. 와인 병이 두세 병쯤 나뒹굴자 친구는 제게 춤을 추자고 했어요. 정말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어요. 또 저는 꿈이니까, 하고 일어났죠. 저와 친구는 손을 맞잡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어요. 귀가 찢어질 만큼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미친 듯이 돌아다녔죠. 한참을 그렇게 몽롱한 정신으로 온몸을 흔들다 노래가 딱 멈췄는데, 그 순간 친구가 제 손에 칼을 쥐여줬어요. 그리곤 저한테 물었죠.
내레이션: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이전에 대화에서 저는 죽음은 곧 ‘無의 세계’가 될 뿐이라고 말했었지만, 친구는 달랐어요. 친구는 ‘무한한 영혼과의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가게 된다고 말했어요. 친구는 제 손에 쥐여준 칼을 붙잡고 제게 진짜 그런지 실험해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꿈이니까. 자기가 알려주겠다고. 그러고 나선 붙잡은 손을 잽싸게 자신의 배로 가져갔어요. 뜨거운 피가 손 위로 흐르자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어요. 친구에게서 쏟아지는 피를 막을 틈도 없이 약통을 찾으러 갔죠.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몰랐거든요. 허겁지겁 약을 집어삼켰는데, 진짜 약이 아니더라고요. 이미 친구가 바꿔둔 거였고, 몇 달간 약을 먹지 않았던 탓에 증세가 심해졌던 거였어요. 다시 친구에게 돌아가 나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물어봤어요. 걔가 말하더라고요. ‘다른 대화 상대가 생긴 것 같아 질투가 났어’라고. (화를 내면서) 고작, 질투. 질투 때문에. 내가 걔가 아닌 다른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고작 말 때문에.
진화: 아니야. 당신 탓이 아니야.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내 탓이 맞아. 씨발! 빌어먹을 말. 씨발 이게 다 좆같은 말 때문이야. 좆같은 혀, 좆같은 생각. 좆같은 호기심. 내가 그 말만 안 했더라도. 지나치게 나의 모든 걸 알려주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침묵. 다시 잠잠해진다. 무언가 다짐한 표정으로 다시 허공을 응시한다) 나 안 할 거예요. 그까짓 말, 다시는 안 할 거라고요.
진화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암전
진화. 스포트라이트.
진화: 그는 혀를 깨물었고, 그의 입안에서는 피가 솟구쳐 흘러넘쳤죠. 방바닥에는 잘린 그의 혀 조각이 굴러다녔어요.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죠. 피가 쏟아지는 입을 틀어막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그는 살지 못했어요. (음향: 삐-) 그렇게도 좋아하던 대화를 관두기 위해 그는 죽음을 선택한 거죠. 하얀 천이 그를 덮어버리는 걸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멍하니 하얀 천위로 제 손에 뭍은 그의 피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어요. 그 피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대화였을지도 몰라요.
진화. 주머니에서 혀 모형이 담긴 유리병을 꺼낸다.
진화: 저는 그의 혀 조각을 간직하기로 했어요. 방부액 속에 담긴 분홍빛 물체를 매일 바라보며 말을 걸었죠. 움직임을 멈춰버린 혀 조각은 대답할 수 없었어요. 한낱 혀끝으로 결정되는 대화가 다 부질없이 느껴졌죠. 말이 이렇게도 나약한 거라면, 저도 그만두고 싶었어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일에 신물이 날 때쯤, 혀를 씹어버린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저는 혀를 씹을 용기도, 동기도 없었어요. 입안에 피가 가득 찰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그래서. 그래서, 차라리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거였죠.
암전.
#4
불이 켜지고, 다시 다리가 배경이다.
음향.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들려온다.
영감. 여전히 접이식 캠핑 의자에 앉아 진화를 바라본다.
영감: 거참, 지랄 맞은 이야기네.
진화: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는다.) 영감님, 혹시 라이터 있어요?
영감: 없어.
진화: 담배도 안 피워요?
영감: 안 펴. 나는 오래 살 거여.
진화: (불이 붙지도 않은 담배를 물고) 정말 심심하게 사시네. 말 수도 없고, 친구도 없고. 무슨 재미로 사세요 도대체?
영감: 낚시.
진화: (비웃으며) 한 마리도 못 잡던데요.
영감: 낚시는 고기를 낚으려고 하는 게 아니여.
진화: 그럼요?
영감: 기다리는 그 시간을 느끼는 것이제. 물살도 느끼고, 저저 갈매기 울음소리도 듣고, 어디 뭐 입을 열고 말하는 것만 재밌나? 난 요러고 가만히만 있어도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진화: 그러면 도대체 말은 언제 하세요?
영감: 가끔 너처럼 이상한 놈이 찾아오면 하지.
진화: 그러다가 말하는 법도 까먹겠다...
영감: 말이라는 것은 잠깐 머물고 마는 것이여.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제. 근데 웃긴 거는 어떤 말들은 고냥 평생 귓가에 맴도는 것이여. 난 고것이 싫어서 말을 안 혀.
진화: 나는 그게 좋아서 말하는 건데... 근데, 영감님 그거 알아요? 나 오늘 진짜 오랜만에 말한 거다?
영감: 그래 어쩐지 말이 많더라.
진화: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이거 이렇게도 좋은 일이라는 거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거 같아요. 고마워요. 영감님. 나 알겠어요. 나는 아마 죽지 못할 거야.
영감: (씩 웃으며)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디.
진화: 그러게요. 뭐. 기왕 살아난 거 다시 살아봐야죠. 질문은 좀 줄이고, 대화도 줄이고. 가능할진 모르겠지만요. 아, 이참에 이름도 바꿔버릴까 봐요. 근데, 그렇게 하고도 대화가 정말 너무너무 하고 싶은 날이면, 그러니까 그 사람 생각이 많이 날 때면, 영감님 찾아와도 되죠?
영감: 거참, 나한테는 묻지 말라니까.
암전.
무대 불이 꺼지고, 커져가는 파도 소리 넘어, 진화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from.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