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네번째 주제 : 꽃
중학교 기가 시간에 ‘상상 속의 관중’과 ‘무대 속의 주인공’이라는 개념을 배웠을 때, 나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해 적지 않아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개념은 그 나잇대에는 마치 모든 사람이 관중이고 내가 무대 속의 주인공인 마냥 생각해서 나 자신이 특별하고 남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부끄럽지만, 그네를 타면서도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으리라 생각을 하면서 한 것 멋있는 척을 하면서 탔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중학교 특성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면모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오산이었다. 물론 그 당시처럼 그네를 타면서 누군가가 쳐다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허황된 생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생각이 ‘허황된’이라는 단어를 쓸 만큼인지 잠시 고민을 해보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이 들만큼이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때와 다른 점은 모든 사람이 관중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틈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더욱더 팽배하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주로 곧 피어 낼 삶의 절정에 대해서 상상했던 것 같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갑자기 노래를 잘해 버스킹을 멋지게 성공하여 모든 사람이 내 매력에 빠지는 상상을 하거나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 멋지게 제복을 입고 등장을 하곤 한다. 혹은 알 수 없는 시상식에서 동료들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수상소감을 하는 상상도 한다. 내용은 천지만 별 다양해서 다 적으면 원고 발송을 취소를 누를 게 분명하니 여기까지 담아내겠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가 삶의 절정이라고 붙이기에는 다소 사소한 일들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내가 느끼기에도 이론적인 삶의 절정이란 훗날 숨을 거두기 10초 전에 인생의 그래프를 그린다면 그 그래프의 최고점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열매가 맺기 전에 꽃이 피어날 때, 열정이 들끓어서 불타오를 때, 그때를 삶의 절정이라고 칭하는 것이 느낌상 적절하다. 이렇게 거창한 의미에 비해서 버스킹을 성공한다거나 갑자기 슝 등장해서 사람들을 구한다거나, 수상소감을 하는 것들이 조금 일상적일 수도 있다. 아니 일시적인 일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기 10초 전에 알게 된 삶의 절정은 기나긴 인생의 만족감을 위해서 그다지 필요성이 떨어져 보인다. 삶의 절정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부단히 나아가고 있는데, 그 결과가 죽는 순간에 발표된다는 건,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이다.
사실 열매를 맺었던 꽃도 돌아오는 계절에 그 자리에서 다시 핀다. 마찬가지로 삶의 절정도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이 폈다, 졌다가 반복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사실 여러 점이라는 이론에 따라, 삶이 시간을 담고 있기에 삶의 ‘절정’이 끊임없이 피고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실용적인 삶의 절정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던 순간들도, 어떠한 결실이 보지 않은 순간들에도 붙일 수 있다.
뭐, 이렇게 말하면 중학교 시절의 내가 “내 삶의 절정이 저렇다고? 그럼 더 큰 것들을 상상했지”라며 다소 실망한 눈초리로 쳐다볼 수 있다. 그러면 지금의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야야, 저것도 빡세. 니가 이 나이 되어보던지"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더 큰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미래의 내가 귀엽다 듯이 쳐다보겠지. 그러다 보다 못한 tv속 윤여정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 얘, 삶의 절정이 한순간이니? 어후 야 그러면 어떻게 긴 시간을 살래, 니가 매일 절정이라고 생각하면 절정이지.”
from.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