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네번째 주제 : 꽃
" 다린 - 저 별은 외로움의 얼굴" 을 들으며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이가 두 자리 숫자가 채 되지도 않는 어린 시언은 엄마인 경미와 자주 걸었다.
경사가 심하게 졌던 아파트 입구에서 나와 금요일 밤마다 각종 애니메이션을 빌려보던 DVD방을 넘어서 꽃집이 줄지어 서 있는 길목을 지나는 것까지가 주된 산책로였다. 집에 자주 올 수 없었던 경미에겐 핏덩이 같은 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금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며, 엄마와 함께 지내지 못했던 시언에겐 애틋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워낙 활발했던 시언은 엄마 손을 잡고 있다가도 그새를 참지 못하고 혼자 뛰어나가 혼나기가 일수였는데, 그 여름의 끝자락에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나는 옅은 풀냄새나 여름철의 후덥지근한 공기보다 엄마 곁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더 좋아서, 그쯤에 유독 차분해진 엄마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를 힘들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어린 시언은 경미 앞에서 자주 의젓한 척을 하곤 했다.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쭉 내밀고 걸었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에 경미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 웃음을 보는 게 시언에겐 행복한 장면이었다.
그날도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중, 길목에 있는 꽃집을 지날 때였다. 늦여름에 피는 꽃들이 길가에 진열되어 있었다.
“엄마, 엄마는 무슨 꽃을 좋아해?”
“엄만 꽃 다 좋아하지. 왜?”
“내가 엄마 생일에 꽃 사주게.”
아홉 살짜리 꼬마치고는 꽤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는지, 시언은 경미에게 자주 꽃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경미는 꽃과 식물, 살아있는 것을 진심으로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작은 싹과 생기를 품은 꽃잎에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언은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꽃을 사주겠다는 표현은 어린 시언에게 엄마한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 표현이었으며, 부디 경미의 생일인 내년 봄까지 경미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그런 시언의 말에 항상 ‘다음에 크면’ 이라고 말하던 경미는 길지 않은 시간을 직감이라도 했는지, 그날은 다르게 말했다.
“그래. 엄마는 분홍 장미를 좋아해.”
그 대답에 엄마가 좋아하는 걸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언은 무척 신나서 꼭 사주겠다며 몇 번이고 엄마의 다짐을 받아냈다. 꼭, ‘분홍 장미’를 사다 주겠다고, 그때까지 건강해달라고. 살아있어 달라고. 시언은 매일같이 ‘치유될지어다!’라고 경미를 위해 선포하곤 했지만, 선포의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시언은 결국 경미에게 분홍 장미를 선물해주지 못했고, 그리도 봄을 좋아하던 경미는 피어나는 새싹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겨울의 흔적들과 함께 기억 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어른들은 어린 시언에게 엄마가 천사가 되어 곁을 지켜준다고 말했다. 그 말에 시언은 천사가 되어 지켜주는 것보다 그냥 내 옆에 있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린 시언을 보며 꼭 짠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가끔은 혀를 차기도 했다. 불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시언은 그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시언은 간절한 기도를 무시한 하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막무가내로 천사로 만드는 신과 싸우고자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머리가 조금 더 큰 시언은 여름철 길가에 나온 장미들을 볼 때면 경미 생각을 한다. 분홍 장미는 없을까, 하고 둘러보다가 분홍 장미를 발견하면 한참을 그 앞에 서서 경미 생각을 한다. 십여 년이 지난 기억은 낡고 녹슬어 희미하게 남은 필름처럼 머무르는데, 마치 흐려진 초점 속의 아름다운 꽃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렬한 여러 색이 형형색색 하게 흩어져 섞여버린, 뚜렷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형태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허브차 한 잔을 달여 반신욕을 하며 책을 읽는 모습, 라디오와 함께 여유 있는 아침을 즐기는 모습, 동화책을 여러 번 읽어달라는 아들의 요구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모습. 그러다가 큰 소리로 ‘언아!’ 하고 외치며 혼내는 모습도. 흩어진 채로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은 금방 흩어져 버린다.
꽃들이 화창하게 핀 봄이면 시언은 경미를 만나러 간다. 손에 쥐어주지 못했던 분홍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따뜻한 손대신 차가운 벽 한 편에 올려둔다.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엄마’라는 낯설어져 버린 단어를 뱉으면 왠지 시공간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 당시 경미가 그랬던 것처럼, 시언은 자주 사과의 말을 전한다. 자주 못 온 게 미안해서, 혼자 온 게 미안해서, 점점 흐려가는 기억이 미안해서, 더 오래 남아 말을 걸어주지 못해서, 차가운 주변의 공기가 미안해서.
경미의 부재에도 시언은 경미를 꽤 많이 닮았다. 여전히 많은 호기심을 닮았고, 가끔 왈가닥하는 성격도 닮았다. 글과 책을 사랑하는 모습도 닮았고, 살아있는 것들을 품으려는 자세도 닮았다.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려는 자세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시언은 경미의 많은 부분을 닮고 싶어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는 경미의 필체를 닮고 싶었고, 경미만큼이나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경미의 부재는 시언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그런 엄마의 필체를 자신을 통해 투영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가끔은 엄마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올려보기도 했다. 제철 과일을 함께 나눠 먹으며 이렇게 저렇게 써보라 말하는 모습,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함께 앉아 서로가 추천해준 책을 읽으며 나누는 모습을 시언은 수시로 상상했었다.
경미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훨씬 글이 더 잘 써질 때도, 공부가 잘될 때도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두렵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른들이 말하던, ‘천사가 되어 지켜준다.’는 말은 이런 것을 뜻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시언은 경미가 흩뿌려둔 모습을 조금씩 수집해가며 성장했다.
겹벚꽃이 잔뜩 핀 날에 한 손에 분홍 장미를 든 시언은 온갖 초록 사이로 걸어간다. 잔잔한 미풍과 작게 조잘거리는 새들, 해를 살짝 가려준 구름 아래에서 미세한 경미의 흔적을 느껴가며, 함께 했을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하며.
from.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