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 둘째주, 은희 : E와 I

겨울호 두번째 주제 : 성격

by 어느 저자

어느 순간부터 MBTI 성격유형검사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SNS 안에서 MBTI는 곧 나를 설명하는 말이 되었고,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대부분 재미로 인한 것이겠지만 이렇게까지 유행이 크게 번진 것을 보니 누구에게나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사실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매력에 꽤나 취약한 나도 유행에 동참해 보기로 했다. 예전에 몇 번을 검사해도 나의 유형은 ENFP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다른 결과가 나왔다. INFP였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에 흡족하며 핸드폰 화면을 껐는데 아뿔싸 캡처를 안 했다! 유행에 동참하게 된 거 인증을 해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검사를 했다. 당연히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 생각하던 나의 확신은 곧바로 배신을 당해버렸다. INFJ 라니. 괜한 오기가 들었다. 한 번 더 하고 중복되는 걸로 결정하자.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배신을 당했다.


가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쓰이는 물건으로, 꼭 어떤 물건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민 모습에 대한 표현으로도 우리는 종종 ‘가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가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개든 여러 개든. 누구에게나 남에게 감추고 싶은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 품 안에 가면 한두 개쯤 감추고 사는 일이야 별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가면을 쓰지 않고 끌리는 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모두가 그랬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서로가 어울려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면은 하나의 필수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커스단의 피에로가 막이 내리면 분장을 지우듯, 우리 또한 현실이라는 하루의 막이 내리고 홀로 있을 때는 가면을 잠시 벗어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하루의 막이 내리고 나서도 가면을 벗지 않을 때, 어디서든 누구와 있든 항상 가면을 쓰고 있을 때, 일상이 결국 가면이 될 때.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내가 가면을 썼다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설명할 때 따라오는 말이 있었다. “착하지 잘 웃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할 때 이 말을 덧붙이고는 했다. “저는 잘 웃고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시선에 예민했던 나는 몇 겹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기보다 누구에게든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에 초점이 잡혀있었다. 나에게 가면은 타인의 비난과 책망에 대한 방패였다. 어떤 무리에 서도 배척받지 않는 것, 나보다는 타인이 우위에 서있던 지난날의 목표가 지향했던 성격은 항상 무난함만을 쫓아갔다. 나쁜 아이보다는 착한 아이를, 짜증보다는 웃음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그로 인한 결과를 무조건 칭찬으로만 들었던 어리석은 나는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서서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가면이 곧 나였고,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새로운 가면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인도 맥그로드 간즈에서 2주간 혼자 지냈던 적이 있었다. 홀로 여행길에 올랐지만 이리 긴 시간 오로지 혼자였던 적은 처음이었다. 길을 잃었다. 여행의 의미를 찾지도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막막한 채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인사말이 다라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가끔 한국인이 보였지만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 용기 또한 없었다. 하루에 밥을 사 먹기 위해 고작 몇 마디 하던 것 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알 수 없는 우울은 어디서 왔으며, 부정적인 생각은 왜 끊임없이 몰려드는 것인지. 외로웠다. 하지만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웃고 싶었다. 하지만 웃고 싶지 않았다. 점점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쩌적- 이후 다시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서로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얘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잘 웃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쩌저적-
아, 뭔가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알지 못했던 가면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비명소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외면한 대가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스스로에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세상에 불평불만이 많고 우울이라는 감정에 예민하며, 타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수보다는 소수에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 조금은 나에 대해 알았다 생각했는데 사실 알면 알수록 복잡하다.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은 그렇게나 뚜렷했으면서 막상 진실된 나를 내보이려 하니 이리 애매해지는 것일까. 우울한 나날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밝아지고, 부정적이면서 가끔은 누구보다도 충동적인 내가 의아하다. 생각해 보면 또 웃긴 게, 왜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알파벳에 묶으려 드는 걸까. E와 I는 공존할 수 없는 걸까. 사실 누구든 그러지 않나. 아무리 내성적이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도 가끔은 밖으로 일탈을 꿈꾸고,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도 어느 날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쯤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나. 우리는 무엇이든 좋음과 나쁨을 결정지어야 하며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함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거는 대체로 좋지만 때로는 나쁠 수 있어, 저거는 대체로 나쁘지만 때로는 좋을 수 있어. 아무리 상반되는 것이라도 한 세계에 공존되어 있다는 것, 변하지 않는 진실인 그 사실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현실이라는 게 대부분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다. 정작 나 또한 그런 유연한 마음은 가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대체적으로 I지만 때로는 E, 아직 다른 알파벳은 무엇이 더 우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A부터 Z까지 크든 작든 모든 알파벳이 존재한다는 사람이라는 것. 여전히 나는 나를 지키는 방패 삼아 때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있지만, 홀로 있을 때는 가면을 벗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를 천천히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중이다. 뭐, 수년간 스스로를 속인 사기 전과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 모습 또한 새로운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From. 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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