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주택

- 더 빛나는 사람들

by 올리브

가난하면 지킬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자존감 지키기'아닐까?

"저런 애들, 다 좋은 집에 태어나서 부모덕에 연수도 가고 하는 거잖아? 자기네가 잘난 건가?"

학창 시절, 어학전공이라는 특성으로 해외연수나 유학을 가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다. 더러는 그들을 부러워했으며, 더러는 나처럼 그들에게 별 관심 없었다. '그래서? 근데 왜 미워하지? 쟤들이 뭐 잘못한 건 아닌데', 난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아이의 부정적 사고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낮아지는 자존감도.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유은실 작가의 "순례주택"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조용하면서도 아름답고 따뜻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이다.


"순례주택"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먼저 순례 씨가 있다. 순례 씨는 평생 세신사로 일해 모은 돈으로 주택을 마련했고, 지금의 빌라를 새로 지은 후에는 입주자들에게 저렴한 월세를 받아오고 있으며, 사후 전재산을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부한다고 한다. 순례 씨는 '순하고 예의 바르다'는 의미의 한자이름 '順禮'에서 '순례자(巡禮者)'의 순례로 개명했는데,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고 한다.

다음은 故박승갑 씨(향년 75세)인데, 201호 거주자였으며 수림의 외할아버지이다. 순례 씨와는 20년 동안 연인이었으며, 거북마을 전파사를 하다가 십칠 년 전부터 인테리어 현장 전기공사를 했다. 지난 1월 공사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생전의 꿈은 순례 씨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였다. 다음으로, '나' 오수림은 순례 씨 사별한 남친의 손녀이자 순례 씨의 '최측근'이다. 거북중학교 3학년이고 주소는 원더 그랜디움 103동 1504호, 1군 가족(아빠, 엄마, 언니)과 거주한다. 원더 그랜디움은 산세권, 역세권, 학세권으로 순례주택이 있는 이른바 '빌라촌'과 대조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1군들을 소개한다. 아빠 오민택 씨(47세), 전임교수가 꿈인 대학 시간강사이다. 30세에 결혼했고, 신혼집은 장인집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돈은 부모형제(부모, 장인, 누나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 이 바람에 불편한 외할아버지는 본인 집을 나와 순례주택 세입자로, 아빠는 장기 무단 점거자로 살아간다. 엄마 박영지 씨(43세)는 전업주부이며, 언니가 생후 3개월 때 나를 임신, 목숨 걸고 나를 낳았다. "엄마를 좋아하진 않지만 깊이 감사드린다. 목숨 걸고 나를 낳았으니까." 언니는 친가로, 나는 태어나자마자 외할아버지에게 보내졌는데 혼자인 할아버지는 순례 씨에게 나를 데려갔다. 순례 씨는 세신사 일을 막 그만두고 '즐거운 은퇴생활'을 준비 중이었으나 이후 7년간 나를 키워준다. 언니 오미림(17세)은 거북고 1학년이며 거북중학교에서 종종 전교 1등을 했었다. 저 밖에 모르며 자가용과 빵방한 냉난방을 선호하고 막 드라이클리닝한 옷 냄새를 좋아한다. '날마다 드라이클리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옷을 입고 BMW mini를 타고 출근하는 20대'가 되는 게 언니의 꿈이다.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싸우기 싫다."라고 수림은 생각한다.


엄마가 사고를 친 건 작년이었다. TV화면에 나온, 모자이크 처리된 어른이 엄마였다.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이 관리가 잘 안 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과 어울리는 게 걱정됩니다." '솔직히 말해서'로 말을 시작하는 엄마, 누가 봐도 엄마였다. 이후 여론에 밀려 공개사과를 한 엄마는, "솔직히 말해서, 길고양이 밥 주는 사람들이 나를 몰아내려고 꼬투리를 잡은 거야. 지들이 권력을 잡아서 우리 명품 원더 그랜디움을 길고양이 천국으로 만들려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빌라촌에 대해서 뭐 틀린 소리 했어?" 엄마는 계속 솔직했다. 영원히 원더 그랜디움에 살며 거북마을에 발도 들여놓지 않을 것처럼.


어느 날, 1군들이 순례주택으로 이사를 온다. 더 이상 돈을 대줄 사람들이 없어서.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돌아가시기 전 사기를 당해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다), 고모들도 더 이상 못 도와준다고 해서 말이다. 이사 오는 가족들에게 나 최측근은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생활수칙'도 있다. 그중 하나가 순례주택에서 학번 물어보기 금지인데, 아빠는 만나는 사람마다 '몇 학번'이냐고 묻기 때문이다.

"나한테 학번을 물어보면 뭐, 16번이라고 대답해 줄 순 있지만." 순례 씨의 말.

"16번?" 최측근이 묻는다.

"어, 중1 때 16번."

"중1 번호가 아직 생각 나?"

"그럼. 학비를 못 내서 얼마 못 다니고 나왔거든. 밭일하면서 가끔 생각했어. 우리 반에 16번은 이제 없겠구나 하고"


수림은 순례 씨와 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엄마는 '순례 씨'만 찾는 수림이 남 같다며 서운해했다. 1군들이 이사 온 후, 입주민 중 '길동 씨'가 엄마, 수림, 순례 씨의 삼각관계 제보를 했다.

"수림아, 니 엄마 앞에서 순례 언니랑 다정한 거 티 내지 마."

"어젯밤에 옥상에 올라가니까 니 엄마가 아파트 보면서 울고 있더라고."

"순례 씨랑 있을 때 우리 수림이는 원래 그렇게 환해요? 그러대. 엄마 속은 뒤집으면서 순례 씨 속엔 폭 안긴 것 같다고."

"서로 사랑하는 건 티를 안 내도 보여.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겐 더 그래. 조심해라. 너랑 순례 언니는 유난히 다정해." 이렇게 친엄마 앞에서 조심할 것을 당부받았다.


"가난한 부모는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기쁘다는데, 나는 가난한 부모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 부끄러웠다." 순례 씨가 사주는 닭갈비상 앞에서 수림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열여섯 여름에 돈을 처음 벌었다. 엄마는 마흔셋 여름에 벌었고, 엄마보다 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살게 될진 모르지만, 엄마만큼 세상에 나가 돈 버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흔셋이 될 테니까." 엄마가 새벽 2시에 일어나 거북 김밥에 출근해서 오전 8시까지 여섯 시간 일하고 받은 7만원과 김밥 네 줄을 보며 수림이 한 생각.


처음으로 다투는 엄마아빠를 보며, "신선했다. 타인이 아닌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우리 집의 불화가. 십육 년을 헤매다 찾은 줄자 끄트머리처럼, 나는 눈물 나게 반가웠다"는 수림의 이야기와 함께 "순례주택"이야기도 끝났다.


나 개인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 존재가치는 입증된다. 순례 씨는 순례주택사람들 속에서, 수림은 비록 1군이지만 가족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더 빛이 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머무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또 어딘가에서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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