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도 스무 살을 맞이하던 해가 있었다
"자살하는 사람은 왜 그런 결정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학교신문사에 들어가기 위한 면접심사에서 당시 심사위원이던 선배가 내게 했던 질문이다.
대학 신입생. 입학한 그 해 3월, 다짜고짜 학교신문사에 지원해서 시험과 면접을 거친 뒤 학보사기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도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막연히 들어간 학보사는 이른바 '운동권서클'의 하나로 분류되어 있던 거고, 나는 날마다 자체 세미나에 참여했으며, 이를 위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책들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신선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세미나를 위한 사회과학 서적들 외에, '사람의 아들'로 대표되는 '이문열'작가의 소설과 우리 근현대소설 모두 내가 읽었던 독서목록들이다. 누군가는 고문으로 죽고, 누군가는 최루탄에 맞아 실명을 하기도 하던 당시, 캠퍼스는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전경들과 최루탄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으며, 그 어디에서도 대학의 정체성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새내기이던 나는 어느새 2학년이 되어있었고, 학보사기자는 이미 그만두었다. 휴교령이 있었고, 종로와 광화문거리를 오가던 대학생들은 수시검문을 당했으며 가방이나 소지품에서 '불온서적'이라 불리던 것이라도 발견되면 바로 연행되었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1980년대에는 도처에서 일어났다. 급기야 교수들과 종교단체는 성명을 내고 삭발을 하고,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섰던 그때가, 그해가 바로 나의 스무 살. 정권이 교체되고 '대통령직선제'가 시작되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며 누구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나는 지금 2025년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로, 일본 학생운동이 격렬했던 시기이다. 반면, 한국의 학생운동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에 절정이었는데, 이 작품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때가 1989년이다. 이러한 시기적 맞물림과 함께, 허무와 상실로 고민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와타나베의 이야기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고등학생 시절, 절친인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항상 함께 다닌다. 그러던 중,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당구를 친 어느 날 밤, 돌연 자기 집 차고의 차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죽음과 삶의 경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죽은 친구의 연인과 데이트를 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도쿄의 대학 기숙사에 머물게 된 와타나베는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나오코는 기즈키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결국엔 자살한다.
"아아,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너와는 달리, 살려고 결심했고, 그것도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어. 너도 틀림없이 괴로웠겠지만 나 역시 괴롭다, 정말이야. 이렇게 된 것도 네가 나오코를 남겨 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나오코가 요양원에 있는 시간에 와타나베가 겪었을 상실감과 아픔, 그리고 절박함이 느껴진다.
"이봐, 기즈키. 너는 옛날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어. 그리고 지금 나오코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 버린 거야. 때때로 나는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아마도 와타나베의 박물관에는, 기즈키와 나오코와 함께 했던 시간과 남겨진 나오코를 사랑한 기억이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잊을 수 없는 건, 사라져 버린 존재도 그에 대한 기억도 오롯이 나의 것이기 때문 아닐까?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작품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 소설의 테마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밝히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은 왜 그런 결정을 한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학보사 새내기 면접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기억컨대, "더 이상 세상을 마주하고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절망이 깊은 거 아닐까요?"라는 식의 답변을 했던 것 같다. 절망은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할 것이고, 절망의 끝에 선 누군가는 삶대신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었겠지. '상실=잃어버림'이다. 내 곁의 누군가가 죽음 내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떠나가면 나는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수일간 혹은 수개월을,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아플 것이다. 타인의 떠나감도, 그로 인해 내가 느끼는 상실감도, 그 모든 기억도, 와타나베의 말대로 모두 내가 관리하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저자인 하루키가 말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어려운 고민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