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선택들
"다른 친구들은 영어 학원 다닌다는데, 너도 다녀보고 싶니?"
"나는 다니기 싫어. 집에 있는 게 좋아."
"그래 그럼."
"엄마, 나 그림 배워보고 싶어."
"그래 배워봐. 어느 학원이 좋을 것 같아?"
"나 그림 그만둘까 봐. 이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러면 얼른 학원에서 짐 싸서 나와. 데리러 갈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익숙하다.
어릴 땐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몰랐다.
엄마, 아빠는 내가 원치 않는 어떤 것을 강제로 하게 한 적이 없다.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하면 내가 스스로 그걸 그만할 때까지 그저 곁에서 바라봤다.
나의 수많은 선택들 중에서 가장 무거웠던 선택은 대학교에 대한 선택일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 교대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교대에 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가족 모두 서울교대 캠퍼스를 구경하러 갔다.
"여기 다니게 되면 좋겠네. 왠지 너랑 잘 어울린다."
엄마 아빠는 늘 그랬듯이 그렇게 말했다.
고등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바라던 서울교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서울대학교에도 합격하게 되어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네가 다닐 거니까 잘 비교해 보고 선택해. 후회하지 않게."
돌이켜보니 고민하는 동안 '내 선택 때문에 누군가가 실망하면 어쩌나'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려웠지만 선택은 생각보다 빨리 했다.
"나 결정했어. 교대 갈래. 안 그러면 초등학교 교실에 있는 내 모습을 자꾸 상상하게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잘 선택했어."
그렇게 난 초등교사가 되었다.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어쩔 수 없지만 나에게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평행세계를 가끔 떠올리긴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oice)이라고 했다.
정답이 없기에 선택은 늘 어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을 통해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부터 선택에 익숙했던 나는 그만큼 선택이 주는 무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
좋은 선택이란 나에게 어울리는 선택이라는 것.
신중해야 한다는 것과 신중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
가끔은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는 것. (왜냐하면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선택에 대한 결과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
선택에 익숙하다는 건 이런 것들을 잘 안다는 거다.
엄마, 아빠는 지금도 다름이 없다.
남자친구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빠가 말했다.
"네가 선택한 사람인데, 당연히 좋은 애겠지."
예전처럼 여전히 엄마 아빠는 나를 지켜볼 뿐이다.
내 선택은 늘 존중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난 지금까지의 수많은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난 일상에서 크고 작은 선택의 상황을 마주한다.
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게 좋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어쩌면 나를 이루고 있을 모든 선택들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