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소나기는 그렇게 무더위를 식혀주었다
오늘은 경복궁景福宮이다.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경복궁景福宮이다.
오늘 둘러볼 경복궁景福宮을 건물 사이로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서둘러서 짐을 챙겨 경복궁으로 갔다. 비가 개인 궁은 말끔한 모습으로 아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곧장 나아가 흥례문興禮門을 통과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에 들려면 금천을 지나야 한다. 다른 조선의 궁에서도 궁에 드는 경계를 흐르는 물로 구분해 놓았다고 한다. 천록天祿이 물속을 보고 있어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여 금천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금천을 지키고 있기 심심해서 호기심 많은 사람에게 장난을 거는 거다. 영제교永濟橋를 건너가며 하늘을 본다. 잿빛구름이 인왕산仁王山 자락에 머물러 있다. 또 소나기가 쏟아지면, 박석마당에 빗물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품계석을 하나씩 지나면서 근정전勤政殿에 다가선다. 멀리 푸른 기와집(청와대)도 보인다.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해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思政殿은 편전이며,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내가 조선의 왕이니라, 이제 조선의 왕은 나다
근정전勤政殿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에는 붉은 해와 흰 달이 떠있으나, 어좌는 비어있다. 그때는 신하들이 내려다보이는 박석마당에서 고개 숙이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곳 또한 비어있다. 화려함 속을 세월의 무상함이 덧칠을 하니 뒤돌아보는 인생사 같이 허망하다. 지난 것은 다 같다. 잡히지 않으면 없다고들 하나, 흥망성쇠를 어찌 다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것도 덧없다 할지 모르나, 어좌 앞에 서서 내부와 천장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 하나쯤은 그 황홀한 색채의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한다. 역사의 뒤에는 쓸쓸함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근정전 둘레를 걸었다. 난간 기둥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지금도 두 눈을 부릅뜨고서 오가는 사람을 경계하고 있다.
근정전이 빈지 오래됐다고, 눈을 깜빡여도 괜찮다고 알려주고 싶다.
너는 위, 나는 아래. 내가 네 뒤, 너는 내 뒤. 잘 살펴라. 얘들아, 이제는 내려와 숲에서 뒹굴며 뛰어놀아도 된다. 근정전이 빈지는 오래됐다.
근정전 담을 벗어나면 왕이 평소 정사를 보던 사정전思政殿에 이른다. 운룡도雲龍圖는 사정전 한쪽 높이 걸린 프로젝트 화면 같다. 천장과 기둥의 단청 문양도 화려하다.
사정전을 나와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에 든다. 왕의 침전이 궁금하였는지 누가 창호지를 뚫어놓은 곳에 나도 눈을 갖다 댄다. 항상 막혀 있으면 뒤쪽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렇게 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 창호지에 구명은 왜 뚫어 놓아 호기심 많은 사람 그냥 못 지나가게 하는지 모르겠다. 왕과 왕비의 침전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방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놓여있는 가구 어느 것 하나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참 보기 좋다. 마루는 무게감 있는 깊은 빛이다. 마루의 경계를 이루는 들어열개문도 그냥 두지 않고 병풍 같이 십장생을 그려 넣었다. 그런 발상과 품격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들어서 열어놓은 문으로 교태전 후원 아미산 일부가 건너와 병풍 한 폭 같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을 보여주고 또 이야기해 준다.
침전 영역 주위에는 전각들과 그 사잇길이 보기 좋게 잘 놓여있다. 교태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도 일품이다.
담장 문양은 같은 것이 없다. 문양을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기 쉽다. 궁에 들 수 없는 사람을 경계하는 미로 인가. 문양 속의 작은 꽃 하나하나에도 정성이 가득하다. 담장 사이에는 작은 문을 연결하여 또 다른 공간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자경전慈慶殿의 아름다운 담 문양 속에는 꽃도 피어 있다. 첫 번째 봄春자 옆 그림문양은 이른 봄, 달 밝은 밤에 휘파람새가 매화가지에 앉아있는 月梅圖라 한다. 서두르다 보니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 굴뚝을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른 계절에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향원지와 향원정을 마저 둘러보지 못하고 경회루로 향했다. 근정전 쪽으로 돌아오면서 보니 근정전 난간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문화해설사가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근정전 주위 높은 곳을 경계하던 석상이 나를 보더니, 또 본다고 씩 웃는다. 그런 기억력 이면 궁을 지킬만하다.
큰 누각이 연못에 떠있다. 경회루慶會樓다. 연못은 물에 비친 같은 크기의 그림자를 품에 안고 있다. 바람이 스치듯 지나면서 경회루를 흐려 놓는다.
경회루에 들지는 못했으나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경회루를 돌아 나오니 소나무 한그루가 다소곳이 서 있다. 궁에 구경 나온 소나무조차도 작지만 기품이 느껴진다. 궁이란 이런 곳이다. 새로운 것을 들여다 놓아도 달라 보인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소나기를 몰면서 밀려온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래도 뛰지는 말자. 궁이다.
근정문으로 급히 와서 잠시 소나기를 피한다. 근정전 박석마당에 소나기가 내린다. 소리를 듣는다. 묘한 느낌이 전해온다. 잠깐 잠잠하다가 다시 쏟아진다. 이번엔 흥례문에서 비를 피한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경복궁 입구도 볼 것이 참 많다. 오늘 경복궁은 이렇게라도 잡으며 보여 줄 것을 다 보여주는 날인 것 같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보인다. 입구가 우산 색깔만큼 어수선하다. 비 때문에 수문장 교대식도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교대식이 없으니 지금 근무자의 근무는 말뚝인가. 광화문을 걸어 나와 뒤돌아본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이 비를 맞고 있다. 시원섭섭하다. 내리는 비 때문에 시원한 것은 알겠는데 섭섭함은 또 무엇인가. 모든 끝은 다 그러한가 보다.
2박 3일의 서울나들이를 끝내고 열차에 올랐다. KTX 열차가 소리 없이 떠난다. 차창에 비치는 풍경도 내내 흔들림 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이런 날에는 덜커덩거리는 기차소리가 듣고 싶고, 내 몸도 흔들리고 싶다. 그러한 사라진 기차의 추억이 그리운 귀갓길이다.
창밖에 비치는 내가 나를 보고 있다. 손을 창에 마주 대자, 더 이상 우리 그리워하지 않도록.
그래도 또 그리우면 내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