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들어왔다

잠시 머무를 줄 알았는데 나갈 생각을 않는다.

by 무상행


구월. 또 놓쳤다.

그렇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 해마다 매미 소리는 주위에서 세상에서 한날한시에 사라진다. 몇 해 전에 우연히 경험했고, 그 신기한 현상을 올해도 그날이 언제인지 꼭 알아보리라 작정했는데 또 놓쳤다. 이렇게 부질없는 호기심일지라도 못내 섭섭한 마음은 금할 수 없다. 알다시피 매미는 오랜 기간(보통 6-7년) 어두운 땅속 나무뿌리에 붙어살다가 성충이 되어 땅에 나와서 단 며칠을 살고, 짝짓기로 끝을 맺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애처롭고도 위대한 매미의 일생에 대한 부질없는 나의 호기심 때문에 매미 소리가 사라진 그날을 알고 싶을 뿐이다. 뭐, 일 년만 기다리면 된다. 세월이란 뒤돌아보면 금방이다.



나무 끝에 조금씩 단풍 물이 든다.

봄은 땅에서 올라오고,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계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봄과 가을은 수직적이고, 여름과 겨울은 수평적이다. 봄은 땅 아래에서 위로, 가을은 하늘부터 위에서 아래로 시작되고, 여름은 남쪽에서부터 겨울은 북쪽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잎이 솟아나는 때가 다 다르듯이, 나뭇잎이 물들고 떨어지는 때가 모두 다르다. 어찌 보면 봄은 오는 것이고, 가을은 가는 것이다. 이러한 당연한 자연의 변화를 알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었나.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 24 절기二十四節氣도 아무리 맞추어도 우리가 느끼는 계절이나 시기보다 많이 앞서간다. 하늘이 정해주는 절기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이런 날씨가 오니 준비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저녁에 브람스를 듣고 왔다.

나무를 보고 산의 빛깔을 보고 하늘을 보고,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온도를 보니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이제는 가을을 준비하자. 외롭다면 더 쓸쓸해질 준비를 해야 하고, 두고 온 것이 있다면 떠날 준비를 하여야 하고, 그리움이 있다면 더 고립될 준비를 하여야 한다. 확 들이닥치니 서둘러야 한다. 들이닥치는 가을의 깊이는 찬란하다.

역시 브람스 음악은 가을에 들어야 제격이다.



시월. 며칠 비가 내린다.

가을비가 며칠 째 내린다. 이번 가을에는 비가 자주 온다. 가을비 빗방울에는 가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고독이나 쓸쓸함이 들어있다. 이것은 아무리 우산을 써도 피할 수 없다. 가을비가 내리면 길가 카페의 창가에 앉아 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기 좋은 날이다. 가을의 우산들은 의외로 형형색색이다. 주위 도시풍경의 단조로움 속에서 형형색색의 우산을 쓰고 걷는 모습은 스케치나 수채화를 보는, 또 다른 가을을 보는 것 같아 좋다. 비에 젖은 활동사진, 이것을 즐긴다. 다음 비 오는 날에 스케치북을 들고 와야겠다. 싹싹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비발디가 들릴 것이다.


풀벌레 소리가 힘을 잃었다.

작은 귀뚜라미가 길가에 나와 세상 구경을 하며 숨어 울기 좋은 곳을 찾는다. 풀벌레와는 다르게 귀뚜라미는 가을비가 와도 어두운 구석에서 운다. 봄에는 산새 소리가 산자락을 가득 채우더니, 가을에는 벌레 소리가 빈 곳 채운다. 산은 비어 있는 것 같으나, 항상 가득 차 있다. 바람은 마른 잎을 흔들며 가을소리를 낸다. 멀리 가을 산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다.



꽃무릇이 지다.

가을을 셈하는 방법은 많지만, 꽃무릇이 지면 가을이 온다는 말도 있다. 며칠 전, 꽃무릇이 지고 있었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모두 수선화과에 속하지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같다. 그래서 꽃무릇은 상사화라고도 불린다. 상사화는 7-8월에 연분홍 또는 연보라색 꽃이 피고, 꽃무릇은 9-10월에 붉은 꽃이 핀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이 잎을 만날 수 없다.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죽어도. 꽃말도 같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붉디붉은 꽃무릇의 꽃이 가을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추억’, ‘영원한 이별’.

꽃무릇의 꽃말이다. 꽃과 잎이 만난 적도 없는데, 꽃말은 예전에 만난 것처럼 사랑이고 이별이고 추억이다. 꽃무릇의 꽃말이 어쩌면 가을을 말할지도 모른다.

꽃무릇이 지니 가을이다. 이제 가을이 점점 깊어진다.


비 오는 날, 공중전화 부스

가을비가 연일 내린다. 비 오는 날, 카페 밖 테라스 파라솔은 비를 맞으며 누워 있고, 저 멀리 구석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가고 목소리가 들린다. 묻는다.

기다린다.

답한다.

또 묻는다.

음악은 바그다드 카페.



문을 열어 놨다. 가을이 들어왔다. 잠시 머무를 줄 알았는데 기다려도 도통 나가질 않는다. 나갈 생각이 없다.

참지 못한 내가 밖을 나선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

찬란한 가을빛들. 길을 걷는다. 가을, 가득 번지며 깊어지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온 가을도 문득 떠나고 싶다. 떠난 사람이 몸에 묻은 쓸쓸함을 털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걱정 마라. 오래 걸려도 기다려라. 돌아온다. 외로우면 돌아온다.

가을 회귀본능回歸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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