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가을. 취하다. 낮별이 보고 싶어 또 취했다

by 무상행


한로 무렵, 밖에서 서성대는 가을을 위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왈칵 들어왔다. 상강을 지나 며칠이 되니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창호지 구멍으로 찬바람이 들어오길래 구멍을 막으려고 하니, 아랫목을 차지한 가을이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아예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안으로 들이는 게 아닌데... 이 가을을 어찌하나....

할 수 없이 내가 나간다.


한로...... 차가운 이슬 (계족산에서)


곁을 지나가는 가을.

가을 햇살에 잘 마른 거미줄에는 낙엽이 한 바가지 걸려있다. 풀색꽃무지 한 마리가 꽃대의 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움직이질 않는다. 잘 익은 모과 속 애벌레는 마른 부스러기를 밀어내며 씨방으로 파고든다. 백 예순다섯, 백 예순여섯.... 잠자리가 떨어지는 낙엽을 세는데 바람에 우수수 잎 떨어진다. 고개를 까닥이다 다시 센다. 하나, 둘, 셋....

산은 제 몸에 불붙은 줄 모르고, 건너편 산 걱정만 한다.

모두가 가을이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도 無想行 하다.



가을 생활예절 하나.


볕이 참 좋은 날이었다.


가을 햇살 아래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잔디밭 가을 풀매기를 하고 있다. 모두 형형색색의 몸뻬바지에다 수건을 두른, 창 넓은 모자 쓰고 있다. 그리고 야외 작업할 때 엉덩이에 끼우는 작업방석은 기본 필수품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일어서더니 사무실 건물로 걸어 들어온다.

화장실이 급했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가,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진 복도를 보고서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선다. 자주색 플라스틱 신발을 현관 입구에 벗어두고 다시 들어선다.


조금 뒤 할머니는 미소 띤 쑥스러운 얼굴로 신발 다시 신고 입구를 나선다.

이층 복도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그날, 볕이 참 좋았다.




절기로 계절이 변하는 것을 짐작한다.

사람은 모으며 준비하고, 나무는 비우며 준비한다.

사람은 열병으로 가슴을 태우나, 나무는 스스로 제 몸을 태운다.

가을. 사람들은 뒤돌아보나, 나무는 눈 감고 제자리에 서 있다.



가을날, 그대의 편지 받다


바람은 건들거리며 산등성이 내려오고, 마른 거미줄에 걸린 날개 하나가 바람에 날갯짓해요.

이런 가을날, 저는 툇마루에 앉아 밖을 보고 있어요.

불붙은 나무, 그 뒤 타는 산. 또 그 뒤 보랏빛 산....


어제는

문설주에 기대어 마당에서 잠자리가 그리는 모나지 않은 원의 개수를 헤아렸어요. 백 마흔세 개를 헤아리다가 갑자기, 작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감국으로 담근 국화주가 생각이 나서 한잔 내어 왔어요. 잘 익었어요. 혼자 낮술 했어요. 몇 잔 마시고 일어나는 순간 휘청했어요. 이래서 앉은뱅이 술이라 하나 봐요.

다시, 툇마루 문설주에 기대어 앉아 이번엔 양떼구름 속 양 몇 마리가 하늘 건너는지 세다가 겉잠이 들었어요.


문득, 이런 가을날, 당신이 올 것 같아 사립문은 활짝 열어 두었어요.

어찌 지내나요. 당신, 여전히 취해있나요.


추신:

당신이 오신다면 여우고개에서 기다릴게요. 국화주도 준비해 놓을게요.





그대에게 답하다


그날. 구월 초아흐렛날에는 노루재 넘다가 산길 산국에 취했는데,

강가 주막에서 산 아랫마을 사람 만나 또 취했소. 그날은 종일 취했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퉁이에서 쉬었소.

곁에 서 있는 나무도 빨갛게 취해 있어 ‘너도 약주 한잔했구나’ 말을 건네니,

나무는 산이 붉게 탄다고 산 걱정만 하더군. 제 몸에 불붙은 줄 모르고.

아무튼 그날, 종일 취했소. 술에 산국에 가을에....


오늘, 바람 불어, 나서기 싫어 남겨둔 밭일을 했소.

쉬며 멍하니 단풍 보다가 그대 편지 받았소.

가을걷이를 마저 마무리했소.

그대 편지를 또 읽었소.

갑자기 그대가 보고 싶었소.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숨겨둔 술을 꺼냈소.

쉽게 꺼낼 수 있는, 숨겨둔 술을 꺼냈소.

혹, 산짐승이 향기 맡고 뒤져 찾아먹을까 봐 나름 깊이 숨겨놓았던 술이오.


이 산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바람이든, 누구든

바람, 하늘, 가을꽃, 단풍, 곰삭는 열매향에는 취할 수 있지만,

술은 안되오.

나 혼자만 술에 취할 수 있소. 양보도 허락도 필요 없소.


결국, 낮술 한잔 했소.

낮술....

낮술 마시다 보면 낮별을 볼 수 있다오.

낮에 보이는 별은 그리 아름다울 수 없소.

그런 낮별이 보고 싶어, 그대가 보고 싶어 낮술 한잔 했소.

더 취하면,

하늘로 떨어지는 가을꽃과 단풍의 처절한 몰락도 황홀하다오.


수일 내,

산에서 주워온 도토리로 묵 만들어 여우고개 오르리라.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추신:

가을 강이 저리 맑으니, 올겨울은 무척 추울 것 같소.

바이칼 호수에 머물던 시린 겨울바람이 남동쪽으로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소.

조만간 창호지에 뚫어둔 구멍을 메워야겠소.

말이 많아지네요. 이만.




(표제와 끝 사진은 정진택 사진작가의 사진. 다음 글에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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