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의 四季_이월 山

겨울에는 계족산의 나무들이 꿈꾸듯 서 있다

by 무상행

大田 鷄足山의 四季


겨울

겨울에는 계족산의 나무들이 꿈꾸듯 서 있다.




이월 山


산에서 이월은 산길이 진지 마른 지로 판단한다.

응달의 잔설殘雪이 마를 때, 웅크리고 있는지 아니면 편히 누워있는 지로도 구별한다.

집에 돌아와 보면 바짓가랑이까지 진흙이 묻어있다.

이월의 산은 쉽게 잊히지 않으려고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 이월의 산은 없는 듯 내게 들어와 있다.

이런 이월의 산 같은 사랑도 있다더라.


이유가 있으면 움직일 때이다. 오후 느지막이 산이 부르는 것 같아 계족산을 찾았다. 일찍 해가 떨어짐을 짐작하여 서둘러 산에 올랐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다.

산성에 올라 쉬어갈 겸 바위에 앉아 차를 한잔 마신다. 이월도 겨울이다. 땀을 식히려 조금 벌려놓은 옷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다. 산성 위 소나무들을 보면서 이리저리 거닌다. 저녁 어스름이 멀리 산디마을로부터 산을 오르고 있다. 겨울 어둠은 걸음이 빠르다. 어둠이 다 오르기 전에 급히 산을 내려간다. 큰길로만 걷는다. 모퉁이 길에서 큰 달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정월 대보름이었다. 서서 한참 동안 처다 본다. 달도 높은 나뭇가지 뒤에서 창백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 다 보고 있다. 겨울 달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겨울 달은 조그마한 관심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다고 너를 계속 볼 수 있도록 야행성이 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산을 내려오니 달이 나를 따라온다. 그림자가 나보다 앞서 간다.

내려와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의 조각들이 하늘로 날려 별이 된다. 차가운 별빛에 눈이 시리다. 이월의 산 앞에서는 무덤덤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이월 산길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길이 이어지고... 길이 가면 나도 따라 걷는다.

길이 산허리를 돌아가고 있다. 곧게 뻗은 길, 휘어진 길, 한 번쯤 쉬었다 간 모퉁이 길. 길만 따라 걷는다. 겨울나무 들은 길이 지나갈 수 있게 비탈로 물러선다. 걷다 보면 떠오르는 지나간 일들을 하나둘씩 산길에다 떨어뜨리며 간다. 이월에도 이렇게 겨울 꿈속 길을 걷는다. 마른 덩굴에서 부스럭 거리는 박새의 부산스러움에 꿈에서 깨기도 한다. 그늘진 촘촘한 골에는 한 바가지씩 뿌려놓은 찬바람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맴돈다. 이월 산은 아직 채울 생각이 없고,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빛깔도 새로운 것이 없고, 휘몰아치던 바람도 급할 것이 없고, 나무도 겨울그림자놀이가 이제는 시시하고, 잿빛하늘도 구름 개수를 헤아리지 않고, 걸어도 허기가 지지 않고...... 그래서 이월 山은 참 심심하다. 이런 것이 좋다. 이월山이 좋다.




올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유난히 추웠고 눈도 자주 내렸다.

차가운 겨울아침. 계족산에 꽃이 피었다. 하얀 눈꽃이 피었다. 눈이 부신 눈의 차가움, 시리도록 아름답다. 같이 볼 누군가가 없다. 다행이다, 어쩌면.

강아지 한 마리와 마주쳤다. 너는 또 어디에서 왔니. 빨간 목줄이 매여있고 통통한 것을 보니 아마 산 아래 마을에서 나처럼 산행 왔으리라. 달려와 장난치고, 앞서 가다 또 돌아오고, 참 부산하다. 한참을 가도 따라오고, 이제 내려가라 해도 주위를 뛰어다니기만 한다. 산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그리 반갑다 해도 저기 꺾이는 길에서 나는 산성 쪽으로 오를 건데... 어쩌나, 너를 어쩌나, 너는 어쩔래.



이월 山. 참 고요하다. 심심찮게 보이던 박새의 무리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산허리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길에는 햇살을 가득 받아 불그스레 한 흙을 드러내나, 안쪽 길에는 여전히 눈이 조금 남아 있다. 이처럼 이월 산길에는 양달과 응달의 경계를 보여준다. 마른눈얼음을 밟으며 길을 걷는다. 한참을 걸어도 여전히 마주치는 이 하나 없다. 웅크린 산, 젖고 있는 길도 걷는 나만 고요 속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산은 오를수록 굽이가 많아진다. 하늘이 잿빛으로 변한다. 그제야 볕을 쬐던 바람이 움직인다. 그만큼 바람을 보고 또 만져보았으나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월바람은 여전히 차다. 큰 굽이를 돌아서니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 서성이 듯 산 봉우리 하늘을 빙빙 돌고 있다.

까마귀는 항상 높은 곳에 머문다. 높은 곳이 잘 보인다.

많이 걸었나 보다. 쉬어가자. 오르내리던 바람도 같이 쉬어 간다. 길가 바위에 앉아 차를 한잔 마신다. 차 한 잔을 같이 나누나 산도 나무도 나도 서로 참 말이 없다. 적막하다. 답답하다. 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갈 길은 먼데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다.



산길에 서 있으면 혼잣말이 많아진다. 응달의 눈사람도 서로 소곤소곤 댄다.

길은 여전히 잘 마르고 있고, 나무는 여전히 그림자놀이를 한다.



눈 길. 진흙 길. 마른 길.

둘레 길을 돌아 산성에 오른다.

계족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디마을.

이월의 논과 산등성이 밭은 점묘법으로 그려져 있다.

조르주 쇠라의 풍경화를 본다. 여기서 본다. 500호 그림을 앞에서 본다.




계족산은 대전 둘레길 5구간(봉황정-절고개)과 6구간(봉황정-장동고개)을 잇고 있다.

장동고개에서 봉황정까지 걸었다. 계족산성이 계족산 정상인줄 알았는데 봉황정에 있는 표지 석을 보니 이곳이 계족산 정상이다. 바위 위에 올려놓은 눈사람이 표지석과 키를 견주고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면서 산길을 열어두고 있었다. 산에는 생각보다 많은 길이 있다. 따라오는 길. 저 혼자 가는 길. 머무는 길. 돌아가는 길. 인생길 같이 길들은 서로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난다. 내려오는 내내 계족산성을 멀리 두고서 굽이굽이 돌았다.

산길을 걸으며 산을 본다. 이렇게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도 괜찮다. 한 번쯤은 작은 소리로 이름도 불러본다. 다가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면 된다. 걷다 보면 길도 생긴다.



이월二月은 개성이 없는 밋밋한, 그저 봄을 연결하는 달이라고 여겼다.

이월二月은, 산을 찾고부터는, 이유가 있는 달이란 것을 알았다.

이월二月 속 이월 산은 없는 듯 있는 산이었다.

이월二月 속 이월 산은 그런 산이다.


없는 듯 있는 이월에, 없는 듯 있는 산을, 있는 듯 없는 내가 올랐다.

그런 달에 그런 산을 그런 내가 올랐다.




삼월에 삼월 계족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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