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1 다시 걸어가기

by 찹쌀아빠



행운이를 떠나보내고, 아내와 나는 서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침대에 누운 아내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 눈빛엔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말로 다 담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얼룩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내의 회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임신은 잠시 미뤄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아내가 다시 건강해지는 게 먼저였다.

몸이 회복돼야 마음도 따라온다고 했으니까.


평일엔 퇴근하고 나서 샤워 후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피곤하다며 침대에 드러눕던 생활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설거지, 청소 같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남편들이 평소에 당연히 해왔던 일들.

겨우 10분, 길어야 20분. 이 짧은 시간마저도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얼마나 무심한 남편이었는지가

아프게 와닿았다.


주말이 되기 전, 전화로 미리 상담했던 한의원에 아내와 함께 약을 지으러 갔다.

회복에 도움이 될까 싶어 처음엔 아내 몰래 가장 좋은 약을 사다 주고 싶었지만,

복용할 사람이 직접 진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아내와 함께 한의원을 찾았다.

의사의 권유로 녹용이 들어간 2개월치의 약을 처방받았다.

그 약봉지를 들고 나오는 길,

나는 아내가 이 약을 다 마실 즈음엔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잠들 수 있기를 바랐다.


바람이 선선해지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 즈음엔

늘 “올해는 어디 갈까?” 하며 여행 얘기를 나눴었는데,

올해는 대신 매일 저녁 동네를 걸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천천히 한 시간씩 동네를 돌았다.

새로 생긴 카페 이야기부터 회사 얘기, 예전 연애하던 시절의 추억들,

아내가 요즘 빠진 음악 이야기까지…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웃으며 걸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살았는데도,

퇴근 후 “피곤해” 한마디로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아내와의 대화를 미뤄왔는지.

아내에게 “하루 어땠어?”라는 말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많지 않았다는 걸.

걷는 동안 아내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고,

나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마음속 구겨졌던 부분들이 하나씩 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고, 다시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다.

어쩌면 그 시간들은

행운이를 보내고 난 우리 부부가 스스로를 다시 껴안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2개월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또 짧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 중순, 우리는 다시 조심스럽게 임신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물론 이번에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마음을 두기로 약속했다.

더 이상 숫자에, 날짜에, 결과에 조급해지지 않기로.


그리고 그날, 12월 26일.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세수도 안 한 채 화장실로 향했던 아내가,

잠시 후 조심스럽게 내 방 문을 열었다.

“여보… 이거, 두 줄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가가 테스트기를 들여다봤다.

행운이 때보단 희미했다. 하지만 분명히, 두 줄이었다.

심장은 다시 미친 듯 뛰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아무 말 없이 안았다.

이번엔 그저 오늘을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내일을 상상하기보다는, 오늘이라는 기적에 마음을 두기로 했다.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새로운 생명.

행운이 이후, 다시 우리가 걸어가기 시작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20250824_221948.png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육아일기]#0 별이 된 행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