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ueres, Spain
...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미술관에서.
언젠가 너에게 물었어. “넌 뭐가 갖고 싶어?”
그러자 넌 내게 체스판을 하나 사다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어.
궁핍한 내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스물두 살쯤 먹었던 난 너에게 그거라도 사서 조촐한 귀국선물을 하고 싶었지.
너는 매번 내게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나야말로 그간 너무 받기만 한 거 같아 내심 미안했었거든.
그래서 난 비록 값비싸고 좋은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체스세트 하나를 구입했고,
바리바리 싸 놓은 짐 가방 한 귀퉁이에 유리로 된 그것을 소중히 찔러 넣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나도 몰래 스며들어 남아있는 얼룩 같은 것이어서 쉽게 지워지는 것도 있고,
그 순간 나 스스로 지각했던 깊이 보다 두고두고 오래도록 물들어 있는 것도 있는 거 같아.
20년 정도 되는 긴 시간 동안 너란 아이는 그저 내게 지울 수 없는 얼룩 같은 존재였어.
그런데 그 모든 시절이 지나가니 어느덧 넌 나에게, 친구지만 가끔 필요하기도 한 몇 %의 눈치와 자존심마저도 죄다 풍덩 던져버려도 좋을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어있더라.
늘 그냥 고단했던 너의 삶만큼 다른 사람을, 특히 나를 관통해 내는 너의 실력은 너무나 탁월해져 있어서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있든 어떤 구실의 말들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너는 통째로 이해할 것만 같단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그러면서 나에게 있어 너란 사람을 생각할 때 가장 크게 남은 기억은 너란 친구로 인해 유독 많은 상처를 받았던 내 어릴 적 모습이 아니라,
다리가 다쳐 혼자 집에서 몸도 못 가누고 있을 적 샌드위치를 손수 싸다가 우유주머니에 넣고 가는 그런 너와, 그 어느 새벽 동트도록 내가 무슨 얘기를 하던지 귀 기울여주던 그런 너와,
눈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매섭게 떨어지던 날,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내게 잠시라도 곧장 달려 나와 겉으론 툴툴거리면서도 따뜻한 차 한 잔부터 먹여주던... 그런 너야.
다행이야.
어느 날 오랜만의 연락인데도 세상 울분 다 토해내듯 쏟아내는 내 장문의 문자를 읽은 후, 보내 준 너의 답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라는 말이 내겐 왜 그리 눈물 나도록 뜨거웠던 걸까.
다 이해한다는 관조적 말투로 토닥토닥해주는 마음, 마치 어릴 적 아픈 어린 내 배를 매만지며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 하는 그런 마음 느꼈던 걸까.
아니 어쩜 그것보다 진짜 넌 신랄한 내 감정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음, 그거였던 것 같아.
누군가에게 말하기보다 늘 듣는 나였지만,
유독 너에게만큼은 투정도 많았는데...
무심한 듯 툭툭 내뱉는 몇 음절 사이에 묻어있는 네 진심을 나 또한 헤아릴 수 있었기에
내가 가지는 마음이란... 결국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이더라.
나 그곳에서 달리(Dali, Salvador Felipe Jacinto)의 작품들을 하나씩 보면서 ‘넌 아직도 달리를 그토록 좋아할까.’ 새삼 궁금해졌어.
우리 그동안 변화하는 서로의 취향과 성향을 내세우기보다는 먹고사는 게 바빠 가끔 안부를 묻는 게 전부였네.
문득 언젠가 너의 가녀린 손목에 조그만 필체로 dali라고 써져 있던 타투가 생각이 나.
그러고 보니 네가 키우던 개 이름도 dali였구나.
내 비록 달리 그림 하나를 보란 듯 네게 “여기 있다~.” 외치며 가져다 줄 순 없지만 나 이제서라도 네게 체스판을 줄게.
그리고 알아둬.
너의 삶 형태가 늘 평온하기만을 바라는 건...
누가 뭐래도 그 긴 세월 동안 변치 않는 너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는 거.
그것 역시.
<친구>에 대하여-
스페인 피레게스, 살바도로 달리(Salvador Dali) 미술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