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의 가을
낙엽은 푹신한 이불을 깔 듯 온통 바닥을 총천연색으로 살포시 덮고 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봄부터 부지런을 떨며 살아오더니 인제 낙엽이 되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커피 향보다 더 고소한 낙엽 타는 냄새가 그윽하던 시골집의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철이기도 하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겨울은 감사의 계절이다. 그리운 만추의 들녘은 풍성한 수확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수확 안에는 1년의 수고와 힘듦이 함께 하고 있다.
가로수로 아직 대다수를 차지하는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가 제철을 만난 듯하다. 꽃이 피는 벚나무나 이팝나무는 봄을 꾸며주고, 가을이 되면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가 가을을 수놓는다. 어릴 적 학교 교정에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는 벤치가 생각나는 시절이기도 하다. 커다란 잎사귀를 주어들고 달려 다니던 그때는 커다란 잎과 기둥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부둥켜 앉고 하도 문질러 줄기가 하얗고, 반질거리던 생각이 난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도로에 온통 깔려있다. 가을을 느끼라고 청소를 안 했는지 낙엽들이 도로에 잔뜩 깔려있다. 하늘을 휘돌아 다니는 낙엽을 보면 ‘아이코, 멋져라’를 연발하고 있다 앞차를 쳐다보니 웃음이 터진다. 바닥에 뒹굴던 낙엽들이 씽씽 달리는 앞차 뒤를 쏜살같이 좇아간다. 달리는 차의 바람과 함께 플라타너스 잎과 은행잎이 달리기 경주를 하듯 뒹굴며 따라가지만 역부족한 것 같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한참 동안 웃다 보니 어릴 적 동네에 소독차 일명 ‘방귀 차’가 붕붕거리며 연막소독을 하려 나타나면 동네 개구쟁이 꼬마들이 수없이 따라 달려가던 모습이 떠올라 또 옛 추억에 잠겨본다. 연막이 구름 같아서 따라다녔는지, 냄새가 좋아서 인지, 아님 그냥 군중심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름이 되면 큰 행사였다.
점심을 먹고 도로에 뒹구는 가장 깨끗한 플라타너스 잎 세 개를 주워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나가 어찌나 큰지 원탁 유리 밑에 깔았더니 유리 바닥이 가을로 가득 찬다. 그곳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쳐다보는 호사를 누려본다. 나뭇잎이 거의 떨어져 나간 나무는 나목이 되어간다. 그래도 그곳에 겨울눈을 잘 키워 내년 봄을 준비할 것이다. 나무에게 용기를 내라고 가만히 말해준다.
1910년경 미국에서 들어와 가로수로 심어져 도로 공해를 책임져온 고마운 플라타너스였다. 지금까지 도로가에 버티고 서서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고, 가지는 매번 잘려 몽당이 되어가도 아무 말 없이 서있는 플라타너스이다. 그러던 것이 플라타너스 잎 뒷면에 달린 털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해 많이 베어지기만 하고, 새로 심지 않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이 멋있다고 하여 가로수로 대체하면서 피해가 더 심해졌다. 그러나 플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은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어떤 나무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현재 가로수로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너무 오래 봐서 인지 친근한 우리 집 나무같기도 하다.
워낙 흔하게 보이는 나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무이다. 커다란 키에 나무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지면 얼룩지게 되어 버짐처럼 벗겨지는 나무라고 ‘양버즘나무’라는 이름도 붙어졌다. 10월경이 되면 한 대궁에 단단한 열매가 한 개씩 방울 모양으로 3~4cm 정도의 크기로 주렁주렁 달려 긴 겨울을 버티고 봄까지 매달려 있다. 버즘나무와 단풍 버즘나무는 열매가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 달린다. 버즘나무는 북한에서는 낙엽 진 겨울날 기다란 끝에 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그란 열매의 특징을 살려 ‘방울나무’란 이름으로 불린다. 굳이 예쁜 이름들을 다 두고 꼭 지저분한 버즘나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니 차라리 플라타너스라고 부르고 싶다. 수령이 많아지면 껍질이 다 벗겨지고, 저녁에도 빛나는 하얀 기둥으로 변해 위풍당당하게 도로와 공원을 지키고 있다. 공원에 서있는 하얀 기둥을 보고도 깨끗하게 좋다는 사람도 있고, 컴컴한 밤에 흰 기둥이 무섭게 느껴진다고도 하니 플라타너스에게 물어봐야 답이 나올 듯하다.
떠나가는 낙엽과 함께 가을은 겨울을 재촉하며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인제 추운 날씨가 찾아올 것 같다. 아마도 유리 밑에 넣어둔 플라타너스 잎이 말라서 부스럭거리면 겨울은 끝나고 떨어져 나갔던 엽흔에서는 다시 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도 따뜻한 봄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못 이룬 소망이 봄에는 꼭 이뤄지기를 지금부터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