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의 백미

자작나무

by 배초향


비가 촉촉이 오는 겨울날이다. 봄비와 가을비는 나름 운치를 준다. 그러나 겨울비는 대지를 깨끗하게 닦아준다. 한쪽 구석에 둔덕을 만들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눈 무덤들을 말끔히 없애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마다 뿌려 되던 염화칼슘 잔해들을 쓸어내 준다. 모처럼 깨끗한 바닥을 보면서 물기를 머금고 있는 도로의 나무들을 위로해 준다. 성당 다니는 길이 좁은 골목길을 거쳐 지나면 끄트머리에 있다. 항상 쓰레기가 널 부러져 있는 데다 좁은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때문에 가는 길이 그리 좋아 보이는 거리는 아닌 것 같다. 하늘에는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고고한 모습의 겨울나무가 이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매번 안쓰럽다. 누군가 작은 묘목을 사다 심었을 것 같다. 한 그루인 것 보면 씨가 떨어져서 자라지는 안 했을 것 같다. 콘크리트 포장된 도로 귀퉁이에 홀로 서있던 이방인 같은 나무는 자작나무이다. 원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공해에 찌든 시커먼 기둥과 잎은 항상 먼지를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있더니 오늘은 영롱한 물방울을 달고 서 있어 보기 좋았다.



아이들에게 나무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하얀 기둥을 그리는 아이들은 없다. 외모부터 독특한 하얀색과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눈길을 끄는 나무이다. 그러나 하얀 피부의 단아한 자작나무가 요즘 길가나 도심에서 공해에 시달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안타깝게 시커먼 얼룩 줄기를 가지고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날개 잃은 흰 천사가 갈 곳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 듯하다. 이런 안타까움은 자작나무가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못 되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원래 추운 시베리아나 유럽북부까지 북반구 추운 동토(凍土)가 그들의 독무대이다. 러시아가 무대인 영화 <닥터지바고>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자작나무 화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북한 산악지대 밑의 남쪽에서는 자생보다는 대개가 심어 가꾼 나무들이 더 많다.


추운 곳에서 살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견디어 오면서도 그리도 고고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버티어온 자작나무.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몸을 몇 바퀴 휘감고도 고고히 이겨낸 소나무와 달리 자작나무는 나무 끝까지 굽히지 않는 곧은 모습으로 세찬 바람과 눈보라도 그대로 의연히 맞서며 견디어 낸다. 햇빛이 잘 비치는 깊은 산속의 자작나무의 모습은 속세를 벗어난 세상 본연의 모습이다. 유난히 흰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잘 맞는 나무임에 틀림없다.


자작나무를 떠올리면 ‘원대리 자작나무숲’이 떠오른다. 자일리톨 껌 생산을 위해 자작나무 69만 본을 40만 평에 조림하여 만들었다. 쭉쭉 뻗어 올라간 하얀 기둥들이 하얀 군복 입은 아저씨들처럼 꼿꼿하게 자라고 있는 곳이다. 하루쯤 방문하여 멍 때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은 방법 일 것이다. 요즘은 인제가 자작나무 덕분에 관광지로 더 유명하게 되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가서 종일 나무를 붙잡고 서 있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원대리 봄과 가을


자작나무는 고로쇠 수액이 끝날 무렵부터 뿌리에서 위로 올라오는 수액을 받을 수 있다. 맛이 달콤하고 상큼할 뿐만 아니라 미네랄, 칼슘, 각종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이 풍부한 수액으로 귀한 천연 건강 음료여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수액은 충치예방 효과가 좋아 치약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자일리톨 껌을 만들기도 한다. 고로쇠나 자작나무 수액을 빼먹는 건 나무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적당한 양의 채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잎은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는 끝이 뾰쪽한 삼각형의 모습이다. 4월이 되면 꽃이 피게 되는데 암수한그루로서 암꽃은 작은 모습으로 위를 향하고, 수꽃은 긴 늘어진 이삭으로 아래로 늘어져 달린다. 목재는 단단하고 치밀하여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고급 재료이다. 팔만대장경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얇은 껍질이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도 않고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했다. 기름기 덕분에 불에 잘 붙고 오래가니 우리네 부엌의 불쏘시개로 유용하게 함께 한 나무이다. ‘樺’는 자작나무를 뜻하는데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를 '樺燭'이라고 한다. 종이가 없던 시절 자작나무 껍질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기 때문에 이곳에 연애편지도 써서 보낼 수도 있었다. 또한 불경도 새기고 그림도 그리는데 널리 이용되었는데 얇은 껍질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어 넓은 종이처럼 벗겨지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에도 충분한 여유가 있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는 자작나무껍질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에 있는 자작나무는 거의 심어진 것이다. 태백산을 산행하다 보면 자작나무과의 나무들이 위치에 따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환경 순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일 아래쪽에는 수피가 거친 물박달나무와 박달나무가 보이고, 그 위로 수피가 붉은빛이 나는 거제수나무가 보인다. 태백산의 정상에 거의 도달하면 태백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사스레나무 숲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눈이 쌓여 있는 이 사스레나무 숲 속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에 잠겨보는 것도 잠시 삶을 쉬어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겨울에 자작나무만 보면 태백산 사스레나무 아래 눈밭에 누워 쳐다보던 파란 하늘에 생각난다. 다들 자작나무과는 겨울나무의 백미들이다.


-아직 어린 화담숲 자작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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