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향기 나는 냇가를 걷다

가을꽃들

by 배초향


후드득 내리는 빗소리에 잠깨기를 반복했다. 찬바람이 침대 위까지 스며들어 창문을 닫는다. 그 덥던 여름도 결국은 지나간다. 세월은 누가 뭐라던 제 갈 길을 찾아 묵묵히 앞만 보고 간다. 남쪽 지역은 물난리가, 강릉은 가뭄이, 일본은 태풍으로 인한 자연재해로 아우성이다.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은 인간이 풀 수 있지만, 신의 영역은 어찌할 수 없으니 속수무책이다.


가을 향기 찾아 집 근처 냇가를 거닐기 위해 나선다. 긴 여름을 밀어낸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그림을 그린다. 지나가는 길목 가게에는 포도 상자가 포개져 있고, 잘 익은 복숭아가 분홍빛 얼굴을 자랑한다. 언제 자랐는지 황토 고구마가 보이고, 보랏빛으로 치장한 늘씬한 가지가 가지런히 모여있다. 동글동글한 호박이 한쪽을 지키고, 빨간 고추도 가을은 내가 최고라는 듯 으스댄다.

아직은 가로수 플라타너스 파란 잎이 싱싱한 채로 햇볕을 받아들이고, 까마중 초록 열매는 까맣게 익어가려고 부지런히 햇살을 마주하며 반짝거린다. 담쟁이덩굴이 큰 잎을 살짝 들어 올려 햇살을 나눠 준다. 작은 잎과 자잘한 열매가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갸륵한 식물이다.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는 도로 공해를 책임지려는 듯 두툼한 잎을 포개며 힘차게 자라고 있다. 그들이 차린 밥상 위의 자잘한 열매들은 먼지에 덮여있어 깨끗이 씻어 주고 싶다.


냇가로 들어서자 졸졸 맑은 물이 흐른다. 물고기들이 수초 사이를 헤엄치며 놀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중대백로는 물속에 제 모습을 비추며 나르시시즘에 빠졌는지 하염없이 서 있다. 아니면 외로워서일까, 물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보고 있는 걸까. 나도 덩달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버드나무와 용버들, 수양버들이 줄지어 서서 가지를 냇물 속에 넣어 세수한다. 살짝살짝 가지를 들어 올리며 그네 타고, 온몸을 흔들어 춤추며 멋짐을 자랑하기도 한다. 나는 용버들에 점수를 더 주고, 파마하느라 고생했다고 쓰다듬어 준다.


산책길에는 사람들뿐 아니라 강아지도 주인과 함께 걸어간다. 꼬리가 떨어지게 흔들며 뛰어가는 그들이 행복해 보인다. 얼마 전에 떠나간 우리 토리 생각이 나서 울컥해진다. 산책 나오던 길에 토리가 잠들어 있는 곳에 갔다 왔다. 토리가 가던 날, 나이 들면서 처음으로 펑펑 소리내어 서럽게 울었다. 날마다 안고 있던 강아지가 빠져나간 허전함을 지금도 매번 눈물로 메운다. 이곳 냇가를 한번도 걸어보지 못하고 간 토리가 더 보고 싶어진다.

냇가 한쪽에는 가을 채전이다. 햇살이 무서워서 얼굴을 감추고 있는지, 부끄러워서 그런지, 호박꽃과 박꽃은 다들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놀리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커다란 열매를 매달고 인간에게 호통치는 듯하다. 대신 노란 수세미꽃은 가을 하늘을 만끽하고 있다. 길쭉한 열매는 주렁주렁 익어가고 있다. 수세미 열매로 수세미 만들기는 참 힘들다. 수고에 비해 가치가 낮았지만 환경에 도움 된다는 생각으로 많이 만들었던 일이 떠오른다. 밭두렁에는 늦은 고추가 붉게 달려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붉은 풋고추를 사서 냉동실에 저장해야 할 것 같다.


작은 둔덕에는 여린 무릇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들은 씩씩하고 멋진 꽃무릇을 동경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볼 때마다 안쓰럽다. 무릇이든 꽃무릇이든 모두 예쁜 꽃이다. 강아지풀이 이젠 누런빛으로 변해가며 잡풀이 되어 어지럽다. 손녀가 어릴 때 강아지풀 열매로 코끝을 간질이며 놀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늙어가며 중후한 멋을 풍기는 건 어려울까. 시들면 모두 예쁘지 않다. 색상이 바랜 쥐꼬리망초와 달개비가 인사한다. 내년 봄에 씩씩하게 만나자고 격려해준다. 귀퉁이에 보랏빛 배초향이 한 무더기 피어있어 기분이 좋아진다. 내 별명이니까 더 애착이 간다.

멀리 키가 크고, 연노란 꽃이 유난히 빛나는 식물이 보인다. 멋진 꽃을 이곳에서 보다니. 닥풀인가 싶어 가까이 가본다. 며칠 전 키가 커다란 닥풀을 봤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딱풀은 닥풀의 뿌리로 풀을 만들어 한지를 만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닥풀, 오크라, 금화규는 꽃이 거의 같아 구별하기 어려운 아욱과다. 잎이 넓고 털이 있는 것을 보니 닥풀이 아닌 금화규다. 전에 콜라겐이 많다고 해서 금화규 꽃차를 샀는데 향과 맛이 별로여서 결국 다 먹지 못했다.


조성된 지 오래되지 않은 길이라서 냇가 나무들의 키가 작다. 그늘이 그리운 여름에는 걷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가을맞이하는 바람이 살랑거리니 제법 사람이 많아 활기가 넘친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다. 씽씽 바람을 가르는 재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자전거도로가 별도로 나 있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면 무서워 움찔해진다.


식물은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늘 자라고 있다. 욕심내지 않고, 시기하지도 않는다.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을 한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자손을 번성시키며 다음을 기약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식물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겸허한 마음으로 가을을 받아들여야겠다.

하루 만 보 걷기가 목표인데 그런대로 잘 실천하고 있다. 기구를 이용한 운동에는 별 관심 없으니 걷기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혼자 가면 조금 느리지만 남편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살짝 땀이 맺힌다. 땀이 맺힐 정도로 걷는 것이 좋다고 한다. 육체적 건강도 챙기고, 자연을 만끽하는 호강까지 누리니 그야말로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인 나이가 됐는데 가까이에 이런 아름다운 냇가가 있어 더욱 감사할 뿐이다. 시간 날 때마다 거닐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 서랍에 있던 저장글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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