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장
가을이 되면 가고 싶은 곳이 많아진다. 붉게 물든 산이 나를 오라고 한다. 산등성이에는 하얀 구절초가 한들거리고, 곳곳에 숨어있는 산국이 노란빛으로 가을을 그리고 있다. 가을바람이 스치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어디론가 나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찬바람이 더 불기 전에 다녀와야 한다는 조급증도 생긴다. 저번 시골에 갔을 때는 아직 들판이 가득하더니 이제 빈 들판이다. 그사이 부지런한 손길이 가을걷이를 다 끝냈나 보다. 뭔가 한 해의 결실물을 사서 저장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다. 감을 한 박스 사고, 고구마와 사과도 한 박스씩 사서 베란다에 뒀다.
긴 가을장마 끝, 모처럼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찌푸렸던 하늘이 맑아지니 가을꽃이 더 눈에 들어온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제일 어울리는 꽃이었는데 요즘은 그리 청초하지 않다. 개량된 꽃은 성형한 얼굴 같다. 코스모스 축제장의 꽃도 다 개량종이다. 길가에 피어 여린 듯 한들거리던 맑은 모습이 그립다. 멀리 무, 배추가 자라는 밭에 가을 녘의 분주한 손길이 보인다. 알록달록한 나무에는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고, 길가의 은행나무에도 가지가 휘도록 열매가 매달렸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도 볼 겸 용문 장날을 찾았다. 5일, 10일이 장날이라고 한다. 용문으로 가는 지하철부터 장터가 됐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모두 나오신 것 같았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분들이다. 아주머니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지하철 안에 빙빙 돌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시끄럽다고 큰소리치는 할아버지도 이해가 된다.
장터는 입구부터 시끌벅적하다. 입천장에 달라붙지 않는 엿이라는 엿장수의 북소리에 장터가 들썩거린다. 가을의 수확물들이 다 나왔다. 가마니에 가득 담긴 붉은 고추가 대장답게 입구에 있다. 잡곡과 야채가 줄지어 있는 좌판에는 투박한 손과 주름진 얼굴들이 있다. 300평에 아스파라거스를 심어 무공해로 키웠다는 아저씨의 말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의심하면서도 두 묶음을 산다. 겨울철 감기 예방에 가장 좋은 햇생강과 햇대추도 샀다. 김장거리로 파닥거리는 생새우까지 사고 보니 뿌듯하다. 덕분에 겨울 김장이 맛있게 될 것 같아 흐뭇하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메추리를 구워 팔고 있는데 대기하는 줄까지 있다. 이 작은 새를 구워 먹다니. 예전에는 포장마차에서 참새를 구워 팔더니 지금은 메추리인가 보다. 한 마리에 3천 원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국밥집과 선술집은 문전성시다. 어느 곳이나 먹는 것이 최고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왁자지껄하고 생기 있는 모습이다. 다들 큰 소리로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끄럽다고 하지 않는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 이곳이다. 멍하게 쳐다보고 서 있다가 갑자기 ‘뻥이요!’ 소리에 깜짝 놀란다.
벌써 다 팔았다고 좋아하는 아저씨가, 한 대야 가득 담긴 다슬기를 하나도 못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다슬기는 아직 살아 움직이는데 팔 의지가 안 보이니. 대야에 가득 담긴 다슬기가 죽을까 봐 걱정됐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장사하던 고등학생 애순과 관식. 하나도 못 팔고 있는 애순을 위해 관식이 일어나서 팔던 양배추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차려입고 나섰다. 어쩌다 장에 따라가면 알사탕을 사주셨다. 십 리 길이었지만 따라가는 특별한 날은 이것저것 진기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푸라기로 만든 포장 속에 정성스럽게 넣은 달걀을 가지고 나가고, 쌀을 가지고 나가서 팔기도 했는데 되로 담아 주고받았다. 그래도 물물교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돌아올 때면 꼭 엿을 한 봉지씩 사 왔다. 해가 뉘엿뉘엿하기 시작하면 동구 밖에 나가서 기다린다. 어쩌다 옷이나 신발을 사 오는 날은 신바람 나는 날이었다. 엿은 그때부터 장날의 단골 메뉴였나 보다.
없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 봉지 저 봉지 속에 정이 듬뿍 들어 봉지가 빵빵하다. 너무 무거워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손수레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 부러웠다. 아침 출근 시간처럼 북적거리는 지하철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모두가 손에 봉지를 들고 서 있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번잡스러워도 5일장에 가는 것은 꼭 물건이 싸고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시골장은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는 곳이다. 장돌뱅이들의 구수한 입담은 고향 마을의 소식들이 이리저리 전해졌다. 도시 사람들은 깔끔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규격화된 상품에서 볼 수 없는, 정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그들은 그 안에서 희미한 고향을 느낄 것이다.
좌판에 펼쳐진 동부와 팥 등 잡곡들이 멀리 떠나신 엄마를 생각나게 만든다. 동부 떡을 만들어 먹던 순간들이 생각나 떡도 한 봉지 샀다. 이런저런 추억까지 함께 넣은 봉지를 두 손 가득 들고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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