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살이 넘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용문사

by 배초향

가을은 낭만을 꿈꾼다. 이번 가을에는 특별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길. 찬바람이 불기 전 꽉 찬 온기가 가슴을 붙들어 주기 바란다. 노릇한 향기가 들녘에 가득하다. 가을이 짙어갈수록 들판의 바람은 가을 향기를 흩뿌리며 넘실거린다. 고개 숙여가는 벼는 짙푸른 하늘을 이불 삼아 뜨거운 햇살 아래 푹 잠이 들었나 보다. 머잖아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을 받으며 일어날 것이다.


가을이 익어가길 재촉하는 붉은 감은 나뭇가지에 붙어 세상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심심한 까치가 자기 집의 밥상인 양 들락거린다. 한바탕 동네잔치를 벌이고 나면 새색시 같던 감의 얼굴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곤 한다. 얼른 주인 품에 안겨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곶감이 되길 바란다.


끝없이 펼쳐지던 들판에 춤추던 허수아비는 어디로 갔을까? 친구 하던 새들이 안 보인다. 멀리 보이는 숲 속의 나무들은 서서히 수채화를 그리며 낭만을 준비하고 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유난히 두텁고 초록이 짙은 은행잎도 한 잎 두 잎 물들어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길가를 푹신하게 가을로 덮어줄 것이다. 은행잎은 겨울을 따뜻하게 준비하라고 알려준 것 같다.


가을이면 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를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아있는 용문산에 있는 은행나무를 찾았다. 1,100살 이상이 넘는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들은 다들 신화적인 전설을 품고 있다. 이곳도 그렇다.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을 때도 이 나무만은 타지 않고 남았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심었다고 하고,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자랐다고도 한다.

천년의 위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데 천년을 더 산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전체가 단아한 모습이다. 고개 숙이지 않고, 늘어지지도 않았다. 뿌리 기둥이 굵고, 45m 높이의 기둥 전체가 싱싱한 잎과 굵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떨어지는 열매는 매년 350kg이라고 하니 가히 거목답다. 천년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잠시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아래 기둥에는 일엽초가 기생하고 있었다. 전에 봤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같이 오래 살아오고 있다.


화석식물인 은행나무. ginkgo biloba다. 공룡이 사라지고 지구가 요동칠 때도 한 종으로 긴 세월을 지켰다. 은행나무잎의 부채꼴은 2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이 이어오고 있다. 인간보다 훨씬 먼저 지구에 살아오던 나무이니 더욱 그렇다. 그렇게 장수하며 견뎌오고 있는 은행나무한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조차 미안할 일이다.

요즘 가로수로 심어있는 은행나무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간다. 가을의 대명사였는데 지금은 베어 내기 바쁘다. 세금까지 들여서 가로수에 있는 암은행나무를 없앤다. 여름의 매미 소리만큼 민원이 많다고 한다. 열매는 고급 식재료에서 멀어져 가고, 떨어진 흔적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향기는 없더라도 코 막고 다니게는 하지 말아야 할 나무가 지나가는 사람을 괴롭힌다. 그야말로 괴로운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세상사 요지경이라고 하더니 은행나무의 생도 그런 것 같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을 행단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자를 가르치는 향교에 은행나무가 심어있고, 명륜당에도 커다란 은행나무 네 그루가 상징처럼 있다. 그에 걸맞지 않은 지금의 신세는 초라하게 됐다.

나는 가을만 되면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한다. 원인 제공자는 은행나무 열매다.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근처만 지나가도 온몸이 가려워진다. 한 달여를 그렇게 지내다 보면 가을이 깊어간다. 열매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진정된다. 나무들도 번식을 위하여 여러 전략을 쓰며 자손을 번성하게 한다. 알이 굵은 은행 열매는 바람이나 다른 매개체를 사용할 수 없다. 스스로 보전하려는 전략이니 내가 견디는 수밖에. 껍질에 강한 독성 물질을 넣어 스스로 지키며 긴 세월을 살아 화석식물이 된 것이다. 대신 나는 강한 독성 때문에 가려움으로 고생한다. 가을 산에 가면 옻을 타고, 집에서는 은행나무 때문에 한바탕 몸살을 하며 가을을 넘긴다. 가을 햇살이 노란 은행잎에 눈부시게 내리쬐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며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러다 밤이슬 맞아가며 멀리 떠나가고 나면 나는 한 해를 낭만으로 마무리할 것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한참 동안 바라다본다. 천년이 넘도록 절 바로 앞에 꼿꼿하게 서 있다. 절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의 번뇌를 대신 껴안아 주었을까. 한 치 앞도 못 보고 허둥대며 살아가는 우리들, 수많은 세월만큼 이 앞을 지나갔을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의 100년은 우리의 1년과 같을까. 때론 봄이기도 했고, 가을이기도 했을 그는 묵묵히 세월을 받아들였을 거다. 앞으로 또 천년의 세월을 살아낼 것이다. 그 앞에 선 나는 익은 벼 이삭처럼 고개가 자꾸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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