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산수유 열매
겨울 날씨가 요란하다. 심술인지 변덕인지 얼음이 바닥에 고인 물 위에 살포시 덮고 있다. 올 들어 처음 보는 얼음이다. 차가운 바람에 패딩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끝자락에 털이 나풀거리는 커다란 모자를 얼굴 깊숙이 눌러쓴다. 얼굴 밑으로는 마스크를 또 한 번 쓰다 보니 나를 드러내는 것은 눈밖에 없다. 코로나 때는 마스크를 종일 쓰고 다니다 보면 눈이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눈동자에는 주름이 없으니 엄청 이득을 본 듯하다. 일요일이지만 아무리 추워도 성당에도 가야 하고, 우리 토리 산책도 시켜야 하고, 가벼운 걷기도 하여야 하니 자연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조막만 한 참새들은 일 년 내내 단벌 옷을 입고도 잘도 살아가는데 나는 대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니 순응하기 위해 내가 져야 한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을 맞다 보니 엉뚱한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뻔히 보이는 것은 미리 대비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차가운 공기나 바람은 내가 쫓아낼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잎은 다 떨구어 내고도 아직 미련스럽게 은행알을 달고 서있던 은행나무가 마지막 찬바람을 못 이겨 아스팔트 바닥에 열매를 가득 떨구고 있다. 어제저녁 부었던 바람에 마지막 미련을 버린 듯하다. 인간보다 후각이 40배가 더 발달됐다고 하는 강아지인 우리 토리이지만 산책길에 떨어진 은행열매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방울방울 열매를 좋아할 법도 하지만 얼마나 지독한 은행열매인지 우리 토리조차도 지나친다. 은행나무의 생존하는 방법이니 어쩌겠는가.
겨울이 오기 전 미리 나뭇잎을 다 떨구고 잔가지에 겨울눈만을 달고 있지만 미련한지 현명한지 사철나무는 아직도 초록색 잎을 그대로 나 두고 오돌오돌 떨고 있다. 초록색 잎이 허옇게 물든 걸 보면 추워 떨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동그란 노란 보자기에 싸인 빨간 보석들이 얼굴을 쑥 내민다. 루비 같다는 생각이 매번 든다. 루비 보석은 없지만 울타리에 공짜로 달린 붉은 열매를 보고 모두가 내 루비라고 생각하면 흐뭇하다. 노박덩굴과 열매들이 다들 이런 예쁜 열매들을 매달고 있다. 다들 떨구고 빈 가지의 맨살을 드러내고 있지만 황량한 울타리를 곱게 장식해 준다. 초라하고 메마른 겨울 울타리에 귀한 보석들을 알알이 달아 주니 크리스마스를 축하해 주기 위해 전나무에 매달린 종들처럼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래도 교목이라고 울타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수유가 보인다. 이른 봄 가장 먼저 꽃눈이 뜨여 봄소식을 전해줄 빨간 산수유 열매가 차가운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겨울 왕국이 돌아왔어도 아직 욕심인지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서있다. 조잘대는 참새들의 입맛에도 맞추지 못하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직박구리에게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매달려 있다. 녹색의 열매가 가을이면 붉게 익어 한약재로도 쓰이고 술과 차로도 사용되지만 워낙 많은 탓인지 재배하지 않고 자라는 산수유는 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어 하얀 눈이 오면 이불을 살포시 덮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잡는다.
비가 오면 깨끗하게 목욕 단장을 하고, 눈이 오면 하얀 이불을 덮고, 바람이 불면 훨훨 여행을 다니며 자연은 항상 행복하게 살아간다. 가진 것이 많이 없어도, 배가 터지게 부르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가장 최고의 날로 생각하고 오늘을 순응하는 자연에게 나를 비추어 보며 나를 내려놓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