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

스님, 나는 스님 못해요. (9)

by 초오록

비 오는 날이 좋은 이유

나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한다.


평소와 다른 주변의 느낌도, 냄새도, 소리도, 그리고 비가 오는 현상 그 자체도.


내게는 비 오는 날에 관한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그날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나도 우산을 쓴다. 그 아래에 서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렇게 재미있다.

아주 크게 들린다지. 따닥따닥 쉴 새 없이.


꾸준히 시끄러우면서 괴롭게는 하지 않는

백색 소음.

나를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소리이다.




어릴 때도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한결같이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소리에 예민한 나에게 빗소리는 아주 큰 소리이고, 끊이지 않는 소리지만 나는 그 속에서 늘 편안했다.


작년 여름까지 비 오는 날은

뭔가 느낌이 좋은 날,

좋은 기분이 드는 날,

평소보다 설레는 텐션에 좋은 날.


좋은 날, 좋은 날, 좋은 날. 그뿐이었다.




이번 여름 나는 비에 관한 동화를 쓰고 있었다.


비를 피해 동굴 안에 온 플루이 아저씨의 머리 위로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이다.


햇빛 쨍쨍한 날 쓰기 시작한 동화는 한창 중반부를 지나고 있을 때 장마 시즌과 겹치게 되었다.


레디 액션!


자, 흐린 하늘 등장하고 방 점점 어두워진다. 타이핑하는 동화 작가 뒤로 빗소리 쏟아진다.

보슬비가 아니라 사나운 비로 쏟아붓는다.

비 냄새 진하게 흩뿌리고, 바람 소리. 잊으면 안 돼.

한 번씩 크게 휘청거려주고.


좋아 좋아.

이야기의 배경이 튀어나온 건지, 내가 이야기 속에 들어온 건지 낯선데 좋아.


됐어. 완벽한 미장센에 괴짜 동화작가 역할인 나만 잘하면 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취해 글을 써야 돼.

분위기 끝까지 끌고 가야 돼.

끝내주게 걸작인 동화가 나오리라.




비 오는 날에 쓰는 비에 관한 글.


애썼지만 나의 동화 작가 연기는 실패했다.

배우의 몰입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몇 번이나 창문과 노트북 앞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비가 오는 저쪽도 매력적이고, 소리를 배경 삼아 글을 쓸 수 있는 이쪽도 매력적인 것을 어떡할까.

한참 글을 쓰다 나는 그냥 의자를 가지고 창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빗소리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하는 일은 크게 없다. 비를 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그렇게 비 오는 날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는다.


그 순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 모양이지.


유레카!

나는 분명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생각이 되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정리되었다.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래, 나는 비 오는 날이 시끄러워서 좋아.’





나는 내뱉는 말보다 속에 담아두는 말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은 편이다. 그러니 내 속은 오만가지의 생각들로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생각하는 행위는 나를 살게 하지만, 또 나를 힘들게 몰아붙인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이 비상시일 때를 대비하여 내 안이 조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잠을 자며 문제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방법도 좋았고, 노래를 들으며 감성에 집중하는 일도 좋았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해 본 경험 중 내 안이 가장 조용했던 순간,

그리고 가장 익숙한 편안함을 느껴 본 순간이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내 머릿속과 가장 흡사하게 시끄러웠고, 충분한 시끄러움이 있으니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제 쉴 수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데시벨이었다. 나는 올해가 되어서야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넌 나의 숨 쉴 구멍이었다.


스님, 아무래도 저는 목탁 소리보다 빗소리가 더 좋아요!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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