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환 그 이후, 나의 직장생활 28년 (12)

연구원에서 공장 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by 리본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창세기 12장 10절)


“너는 6년의 직장생활 동안 도대체 한 것이 뭐가 있어? 번듯한 자격증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토익 점수도 엉망이고, 그럼 돈이라도 많이 모았는가?”

첫 번째 이직을 위하여 찾아간 그곳에서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면접을 봐야 했습니다.

어쭙잖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끝내자, 외국인을 상대해야 할 프로젝트매니저를 뽑고 있던 그 외국계회사의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저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셨습니다.

"아닙니다. 돈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럼 뭐 했어? 여태껏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로 못 가고..."

이제 저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 중반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예 사실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막상 회사를 이직하려고 보니, 그럴싸한 스펙을 쌓아야 하고, 나름 저를 포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직장 생활하면서 상사든, 동료에게든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배우고 열심히 일한 것 밖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너는 당장 공장을 가더라도 그 관리직 중에서 영어실력이 가장 꼴찌일 거다.”

사장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한번 더 저를 보시더니 결국 내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으시고는 일어나셨습니다.

"잠시 기다려"

사장님이 회의실을 나가시자, 저는 면접에서 떨어졌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저를 회의실로 안내하였던 그 인사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연봉계약서입니다. 둘러보시고 이상 없으면 사인하세요"

저는 연봉 협상은커녕 계약서 내용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바로 사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난생처음으로 외국계회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야 R대리, 내가 사장님께 R대리 아니면 뽑을 사람 없다고 얼마나 졸랐는지 아냐? 아무리 이력서를 뒤져봐도 혼자서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더라.

특정분야의 기술자는 다른 부분을 모르고... 그리고 허가나 예산관리를 했다는 사람은 실제 건축이나 공정을 모르니... 그나마 R대리는 공장 짓는데 두루두루 관여했고, 또 면접할 때 혼자서 공장을 지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잖아?"

나중에 공장에 배치되어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 저를 1차 면접하셨던 공장장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토목기술자, 건축기술자, 전기기술자, 제어(계장) 전문가, 설비(장치) 전문가, 프로세스 엔지니어, 유틸리티전문가, 그리고 인허가와 예산 등을 관리하는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매니저) 등이 필요합니다.

마치 어벤저스처럼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한 팀을 이루어 공장을 짓습니다.

여기는 200억 정도 투자 규모라 금액은 제가 경험한 공장건설 프로젝트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각 분야의 기술과 경험은 고스란히 필요한 것이라 14명 규모의 프로젝트 인원이 필요하지만 공장 직원이 100여 명 정도인 공장에서 이러한 멤버를 꾸리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일시적인 것이라 프로젝트가 끝나면 필요 없다고 다 내보낼 수도 없고...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사람을 뽑는데 인색한 외국계회사의 특성상 본사에서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매니저를 한 명 뽑으라고 지시를 하였답니다.

노심초사 이러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분야를 혼자서 다 커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래서 일단 채용하고 보자고 내부적으로 합의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표면적으로나마 일당 십 이상의 스펙을 쌓게 되었을까요?

제 이야기는 이제 그 전대미문의 방대한 중국출장을 끝낸 후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저희들의 그 창대한 중국출장은 결국 회사로서는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중국 출장의 목적이 공장을 짓는 후보지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자연히 출장기간 내내 공장에 대하여 틈틈이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2여 년간 중국을 드나들다 보니 지속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 연구소에서의 저의 역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일상적인 업무가 아닌 프로젝트성 TF팀 소속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팀은 저희 사업부의 창사이래 가장 큰 프로젝트인 서울과 부산 도심에 있는 공장을 지방 산업단지 내로 이전하는 프로젝트를 위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에 공장을 세울 20여 년 전 당시에는 그 지역이 다 논이었었는데, 이제는 주위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공장 주위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따라서 큰 장치산업인 우리의 공장은 더 이상 도심에 있을 수가 없어 모두 산업단지가 있는 군산으로 이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상승한 땅값 만으로도 군산에 큰 부지를 사서 양쪽의 주요 설비를 이전하기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하여 서울공장에 있던 공장의 베테랑(선임 과장급)들을 중심으로 15여 명 정도의 기술팀이 꾸려졌고, 공장의 경험이 없던 저는 팀의 비용을 정산하는 총무의 역할을 맡아 과장님들의 수발을 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공장을 이전하기 위해 1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공장을 운영하지 못하는 동안 부족해질 재고를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2단계는 군산의 매립지에 토목공사를 하고, 건물을 짓고, 유틸리티 설비를 갖추는 것이었고, 3단계는 부산의 주요 장비를 분해하여 군산으로 이송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국내 최고의 엔지니어링업체들이 설계와 시공의 견적에 참여하였고, 공장 건축을 위한 디자인을 맡아했습니다.

그 회의 과정에 총무 겸 서기로 참석하였기에 대략적인 공장건설에 관한 프로세스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엔지니어링업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실제로 시공을 맡을 업체는 분야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었고, 규모가 천억이 넘는 공사라 많은 하청업체들도 저마다의 우리 공장, 혹은 우리 공장관리자들과의 연고와 공급 관계, 고유의 실적을 기반으로 현장으로 들어와 공사를 나누어 맡았습니다.

15명의 팀원들을 위해 군산의 아파트를 빌려 숙소가 마련되었고, 우리들은 사무실이 없어 현장의 컨테이너에서 거의 1년을 보내어야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추억들이 많았습니다.


저와 같은 젊은 대리들(과장님들 또한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어서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이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것은 역시 매일 일어나는 술자리들이었습니다.

많은 업체들이 접대를 한답시고 군산의 맛집이란 맛집과 근사한 술집들로 우리 과장님들을 데리고 간 덕분에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지만 이어지는 연이은 술자리들이 너무 과하여, 특히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젊은 세대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세대차이가 있었네요.)에게는 고역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헬스장을 끊고 운동 가야 한다고 피해 다니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늘 끌려다니며 술을 마셔야 했습니다.

숙취로 아침 내내 헤매다 일에 집중할 오후가 되면 마담들이 간식거리를 싸들고 현장에 나타나서는 간밤에 술김에 건네준 과장님들의 명함을 출입증으로 들고 드나들기도 하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술자리는 육체적으로 부담이 되고, 딱히 취미도 없었던 과장님들과 이사님들은 때로는 업체 사장님들과 함께 식당에서 고스톱이나 포커를 치셨습니다.

저희들도 우리들끼리 숙소에서 남는 시간은 포커를 치면서 보냈습니다.

저는 주말이면 꼬박 서울로 왔지만 숙소에 남아있는 과장님들은 평생 개인적인 취미 생활 없이 직장에만 올인하였고, 딱히 자기계발 등에도 관심이 없었던 세대였기에 하일 없이 포커나 고스톱 등으로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오랜 직장생활의 경험으로 이 분야에서 나름 들이 되셨기 때문에 저 같은 젊은 대리들은 늘 잃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잃는 것이 하도 분해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포커에 관한 책을 사서 거의 암기하다시피 숙독하였고, 그 이후 웬만해서는 잃지 않는 요령을 체득하게 되었을 때, 호남은 어느덧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호남은 한번 눈이 내리면 큰 폭설로 변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눈이 하도 많이 내려 아침에 과장님이 공사 현장을 가보니 현장에는 어떤 업체도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눈이 쌓인 철골 위를 올라가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자칫 잘못하면 평지에서도 미끄러지는 안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공사하는 업체들도 출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에는 눈이 쌓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업체는 아예 공사를 중단하였고 당연히 우리들도 출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 아침부터 우리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한 3일 정도 출근도 하지 않고 포커만 쳤던 것 같습니다.

눈이 하도 쌓여 짜장면도 배달이 되지 않아 매 끼니 때면 우리는 숙소 밖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가 맛도 따질 겨를 없이 식당에서 주는 대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저에게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디자인이 끝나고 공사가 시작되자 담당 기술자였던 과장님들은 실제로 공사를 감독하느라 매일 바쁘셨지만 따로 맡은 분야가 없었던 저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도면을 가지고 다니면서 공장의 설비와 파이프라인 등을 눈으로 배우며 현장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공사기간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는 일단의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산 공장의 생산을 중지하고 설비를 분해하는 순간부터 운전할 설비가 없어져 버린 현장 생산직사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장의 설비가 분해하고 이송하고 다시 설치되고 파이프, 전기 공사 등이 연결되고, 본격적으로 시운전하는 약 5~6개월가량의 시간동안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눈이라도 오면 현장의 눈들을 치우고, 공사 후 남은 자재들을 정리하고 주변을 청소하면서 눈치를 보며 소일거리라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점심시간 때면 우리는 공사업체 직원들이 본격적으로 식사하는 시간을 피해 준다는 핑계로 공사장 한밭식당에 11시 반부터 모였습니다.

그리고 10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공사장 인근 공원으로 달려가,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는 1시까지 열심히 공을 찼습니다.

"저놈의 자식은 축구하러 왔나?"

기술팀의 이사님께서 1시면 땀을 뻘뻘 흘리며 부리나케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오는 저를 보시며 혀를 끌끌 차셨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공장 건설의 1차 stage는 끝나가고, 부산에서 이전한 설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들은 2차 stage, 서울공장을 이설 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1차에서 미흡했던 부분들을 개선하고 2차 stage에서는 보다 원리에 입각하여 보다 개선된 모습으로 프로젝트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직 속에 있는 팀의 막내로서 그것은 개인의 욕심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팀들은 개선이 없이 동일한 방식으로 2nd stage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대부분의 한국회사가 그렇듯이 사실 경영진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업문화였기에 선임과장님들은 당연히 임원들의 지시를 그대로 답습하였습니다.


저는 비로소 이러한 조직에서는 시스템 면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직 시스템의 운영 등에 대하여 외국계회사가 더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회가 많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외국계회사로 이전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처음 도전한 앞머리에 언급한 이 외국계 회사에서 요구하는 스펙이 저의 어중이떠중이 같은 이 프로젝트의 경험과 맞아떨어져 저는 비교적 쉽게(?) 두 번째 직장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는 동양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에 이어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화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로 장기 여행(역시 출장이라고 볼 수도 없는)을 공짜로 가게 된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결정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지금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이때는 자기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인 직장을 이직하는 결정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마음이 끌리는 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닥쳐온 기근에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식량을 찾아 애굽으로 떠난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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