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inction of Experience
낚시 경험을 잡으러
친구의 초대로 낚시를 다녀왔다. 굉장히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낚시였는 데 그 크기가 2m 가까이 된다. 같이 동행하는 어부가 낚시에 필요한 장비와 배를 모두 준비해 주기 때문에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하는 낚시에 신이 났고 게다가 큰 물고기를 낚아볼 요량에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그렇게 따라간 낚시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낚시의 과정은 미끼를 준비하고 낚싯대를 들고 물가로 나간다. 그리고 손으로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우고 물에 던져 물고기가 물 때를 기다리다 낚아 물고기를 잡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낚시에서는 어부가 생각 외에 모든 것까지 준비해 주었다. 배, 미끼, 낚싯대 심지어 미끼를 끼우고 줄을 던지는 것까지도 함께한 어부가 다 해주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큰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흔히 '손맛'이라고 불리는 낚싯대를 당겨서 물고기를 낚는 것만 하고 돌아왔다. 물론 상황의 특수성을 생각해 봤을 때 초보자가 하기 어려운 일이라 전적으로 어부가 담당했다고 짐작하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는 이건 낚시라고 할 수 없었다. 따로 낚은 물고기를 먹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굉장히 큰 물고기를 낚아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영상도 남기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는 만족감이 굉장히 높았지만, 낚시를 중심으로 생각을 해보았을 때 내가 한 것들이 과연 낚시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을 주고 물고기를 낚는 경험을 샀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모든 곳에서 이런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경험을 돈으로 주고 쉽고 편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집에서 더 편하게 영상을 보며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을 때 이 책 '경험의 멸종'을 알게 되었다.
직접 경험의 멸종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2025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눈부신 기술을 발전을 목격해 왔다. 산업혁명을 넘어 인터넷의 발전 그리고 AI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기술의 발전이 의미하는 것은 효율이다. 먼 과거에는 식량을 얻기 위해 씨를 뿌리고 거두는 등 긴 시간을 노동을 투자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료품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 마트에 가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핸드폰으로 배송을 시킬 수도 있고 원한다면 새벽배송까지도 가능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의 혜택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인류의 진화 속도 보다도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왔던 유전적인 특성들은 아직 몸에 있지만 몸 밖의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했다. 손글씨에서 키보드로, 그림 그리기에서 사진 찍기, 섹스에서 포르노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직접적인 경험'이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매개된 경험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아직 미지수다.
기술의 발전에 의해 변화하는 것들이 '우리가 즐기는 것들'만이 아니다. 인간관계 역시 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만남과 장소가 필요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장소로 나가서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실시간적인 반응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인간관계를 쌓아나갔다. 이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싫어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겉으로 싫어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친하게 지낼 수 있다. 당장 핸드폰을 열어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며 지낼 수 있다. 그렇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의 직접 경험이 부족해지고 선택적으로 인간관계를 쌓아갈 수 있게 되다 보니 사람들과 인연을 쉽게 끊어낼 수 있고 더 나아가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도 점점 쉽게 하도록 변화하고 있다.
기술에 매개된 경험은 반응이 빠르고 더 쉽게 도파민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일반적인 직접 경험들처럼 이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비교적 쉽고 빠르게 기술을 매개하여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설탕과 같다. 빠르게 단맛을 느낄 수 있어 손이 쉽게 가고 가장 빠르게 에너지로 사용하여 당장에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기술을 통한 매개 경험은 사람들에게 쉽고 빠른 선택이 되고 있고 당장의 간접 경험을 통해 빠르게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아직까지 이러한 변화가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결말을 가져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꾸준한 설탕 선택에 대한 대가는 당뇨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매개된 쾌락을 계속해서 사용했을 경우 어떤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지 힌트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매개된 쾌락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이다.
메시지보다 메신저
근래 들어서 자주 느끼는 감정은 답답함이었다. 그 원인으로 뾰족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면 그건 내가 헛똑똑 하다는 느낌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삶을 살아가는 지금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물며 인간관계에서도 내 안에 답을 가지고 생활했다. 내가 어렸을 적 꿈꾸었던 나이가 들어가는 삶이란 정답을 알고 행동하고 그 답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어른들을 만나면 정답을 물어보고 같은 고민을 가진 후배들을 만나면 그 정답을 나눠주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곳에서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또 찾은 정답에서 안도를 느끼며 기준으로 삼고 실천을 해왔다. 적어도 20대까지는 이 믿음이 통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난 후 내가 내린 정답이 오히려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는 것을 느끼며 삶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디서 이런 정답을 찾게 된 건지 생각해 보았다.
요즘 가장 많은 답을 찾을 수 있던 곳은 유튜브였다. 누굴 찾아가서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해 볼 필요도 없이 검색으로 설명이 있는 동영상을 찾고 결론을 보며 답을 찾았다. 모든 답이 유튜브 속에 있다. 예외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연인, 부모님, 친구, 자식과의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건강, 지식, 환경 등등 모든 것들의 답이 유튜브 속에 있다. 답을 찾기 위해 내가 움직이고 땀을 흘릴 필요가 전혀 없다.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넘기면 정답이 있다. 그렇게 나는 다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착각에서도 무엇인지 모를 간극을 느꼈다. 정답을 알고 행동하지만 전혀 자신감이 없는 상태. 만약 정답을 알고 있다면 왜 자신감이 없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서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경험은 내가 내린 답에 확신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술을 통해 미리 정보를 확인하고 간접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축복이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나은 길로 나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답을 그대로 닫아두고 싶지 않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내가 이미 가진 정답들이 언제든 다시 검증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졌다.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 본인의 삶을 완성시켜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의 직접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 밑에서 수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이 간극을 느끼고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선택하였다. 그 후에 그는 직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 나 역시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에 매몰되는 사람보다 직접적인 경험들을 바탕으로 정답 자체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