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내 아내를 만나다 . . 현실편..
때는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0년 8월 19일
“빵-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군산항을 밀치고 나아간다.
“꺄륵... 끼륵..” 덩달아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으며 우리의 승선을 기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직장동료로서 45살 이선배 님. 34살 정선배 님. 28살 유선배 님. 27살 인 나를 포함해서 4명이 의기투합하여 4박 5일의 여정으로 선유도로 향하는 길이다.
지금이야 군산에서 차를 타면 이삼십 분이면 도착하는 섬 아닌 섬이지만 그때는 군산에서 배를 타고 2시간여를 족히 가야 볼 수 있는 외지 섬이었다.
드디어 배가 뱃고동 소리를 “빵-앙”하고 내며 군산 항만을 빠져나간다.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낭에서 소주를 꺼내어 승선 기념 술잔을 홀짝이며 흥을 돋우며 기분을 내었다.
그때 눈앞으로 쉬-익하며 날아가는 갈매기 한 마리...
아무 생각 없이 갈매기가 날아가는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돌리는 순간 뱃머리에서 긴 머리를 너풀너풀 바람에 날리며 우아한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처자 3명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저 처자들 분위기 참 좋네요.. 같이 술 한잔하자고 하죠”
“좋지.. 이봐 젊은 처자님들 재미없는 바다만 보고 있지 말고 이리 와.. 이리.. 이리 와서 한 잔 혀..”
라며 몇 번인가 말을 건넸지만 먼바다만 쳐다볼 뿐 묵묵부답이다.
“허 빼지 말고 이루 앉아요.. 한배에 탄 것도 인연인데...”
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대답은
“됐네요”라며 아주 간단하고 싸늘한 대답만 한다.
서해를 가르는 선상에서 맛있는 안주에 술 한잔하자는데 뭘 그리 새침하게 싫다고 하는지....
배를 타고 1시간쯤 지났을까.
배 안에서 쉬고 있던 이선배, 유선배가 나오고 도란도란 선유도에서의 일정을 이야기하는데 아까 그 처자들이 최수종을 꼭 빼닮은 유선배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아-역시 얼굴은 잘 생기고 봐야 돼....
사진을 찍어주던 유선배가
“그런데 이런 오지에 여자분들끼리만 왔나 봐요”
"네.. 그래서 선유도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많아요”
하며, 우리가 말을 걸 때마다 유난히 사이다처럼 톡톡 쏘던 처자가 경계하듯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한다.
나이 지긋한 이선배가
“그럼 우리랑 같이 가죠.. 우리가 알아본 민박집이 괜찮다고 하던데요”
“정말요.. 좋아요 좋아요” 하며 뛸 듯이 기뻐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선배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어쩜 저럴 수가 있나 하는 괘씸한 생각이 든다.
어느덧 선유도에 도착하고 내가 대학 다닐 때 MT 와서 묶었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장자도, 망주봉 등산 등 선유도를 두루 관광하고, 낚싯배 한 척을 빌려서 고금산 열도의 섬들을 돌아보기도 하며 4일을 보냈다.
이제 어느덧 내일이면 4박 5일의 휴가를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갈 시간,..
선유도로 오는 배 위에서 만난 처자들은 장난기 많은 정선배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내가 어찌할까 봐 나이 많은 이선배와 매너도 좋고 훈남인 유선배 옆에만 맴돌며 다닌다.
정선배야 유부남이라 그렇다고 치지만 총각인 나는 괜히 화가 났다.
뭐 딱히 맘에 드는 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뭉개진 느낌이랄까..
저녁 어스름이 낄 무렵 나는 모래 범벅인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갔다.
지금이야 펜션이나 민박집이 샤워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방은 여럿인데 샤워실은 여자용, 남자용 달랑 두 개뿐이 없었다.
더욱 어제 민박집주인이 철수하며
“오늘 보니 남자 샤워실에는 전등이 나갔고 뜨거운 물도 안 나오니까. 웬만하면 여자 샤워실 하나만 이용해요”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여자 샤워실로 들어갔다.
몸을 쓱쓱 싹싹 닦고 비누 칠을 한 다음 미지근한 물로 깨끗이 아주 깨끗이 비누거품을 씻어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탁탁”터는 순간.... 문이 “벌컥”열렸다.
“엄마야” “으악” 하는 두 비명소리와 함께 1초, 2초, 3초.... 10초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확히 10초간 비스듬하게도 아닌 완전 정면으로 내 몸을 흩어보고 있는 처자... 그리고 “후다닥” 뺑소니를 치는 게 아닌가.
아이고 망신.. 그렇지 않아도 4일간 나를 날강도 쳐다보듯 하던 처자인데 내 몸까지 세세히 봤으니.. 창피하기도 하지만 은근히 화도 났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기분도 기분인지라 나오자마자 마구 큰소리로
“나와 선미 씨.. 나와.. 내 몸 봤으니 책임져” 하며 큰소리를 쳐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하더니 자초지종을 듣고는 우리 팀들 재미있다는 듯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럼 책임져야지.. 총각 신세 정말 버렸구먼.." 하지만 처자들 방에서는 감감... 저녁 밥때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나타난 선미 씨가 하는 말
“못 봤어요.. 진짜 조금밖에 못 봤거든요” 하며 무슨 못 볼 것을 봤다는 마냥 툭툭 말을 던졌다.
“조금밖에 못 봤다고.. 얼마 큼이 조금이지..” 하며 우리 팀은 좋은 이야깃거리 생겼다며 난리가 난다.
선미 씨의 친구들도 자신들의 일이 아니니 뭐 어때라는 식으로 “책임져 다.. 봤으면 책임져야지” 하며 거들었다
다음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때도 선미 씨가 내 옆에 앉지 않으면 안 간다고 버텨서 결국 옆에 앉혀서 서울까지 왔다.
여행 기간 내내 나를 날강도 쳐다보듯 해서 그렇게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나중에 사진이라도 주고받으려면 연락처가 필요하니 알려 달랬더니 당치도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참내 이런 끝까지 나를 날강도 보듯 하는구먼..”
“자 여기 내 명함입니다. 혹시라도 사진 줄게 있다던가 하면 연락 주세요”
선미씨는 마지못해 "네" 하고 뾰루뚱한 얼굴로 명함을 집어서 가방 안에 “툭” 하고 던지듯이 넣었다.
휴가 때의 일은 차츰 잊고 회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철이 씨 전화받아요”
“예 왕철이입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유도에서 같이 휴가 보냈던 선미입니다.”
“네? 아 - 네에 예 잘 지내셨어요”
"네 다름이 아니라 선유도에서 우리가 찍은 사진도 있고, 그때 너무 신세를 많이 져서 저녁이라도 대접하려고요."
“아 네에 그럼 제가 선미 씨 사무실 근처로 갈까요?”
“뭐요? 아니 아니 아니요. 혼자 말고 그때 같이 왔었던 분들 모두 같이 봤으면 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종로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4시에 뵙지요.” 딸깍
“여보세요.. 여보세요..” 뚜뚜뚜
“이런 끊었네.. 햐 완전 나를 무시하는 구만...”
토요일 오후 4시 우리는 약속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서로 사진들을 주고받고 저녁 겸 술 한잔을 하며 자연스럽게 선유도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정선배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선미씨 순진한 총각 몸을 세세하게 전부 다 봤으니 책임을 져야 되지 않나, 언제 국수를 먹게 해 줄 거야.”하며 그때 그 사건을 이야기했다.
모두 심심하던 차였는지 "맞아, 맞아" 하며 이구동성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부추긴다.
선유도에서는 하고 한날 반쯤 취해있었고, 나를 무슨 날강도 쳐다보듯 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고 보다가 서울에서 화사하게 화장하고 옷을 맵시 있게 잘 차려입고 나온 선미 씨의 모습을 보니 한눈에 반하게 되어 책임지라며 나 또한 마구 생떼를 부렸다.
결국 샤워실 문 한번 잘 못 열어서 내 몸을 본 죄로 곤욕을 치르고 있던 선미 씨는 다음 주 토요일 5시에 만나자는 약속을 자의 반 타의 반하고서야 다른 이야기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토요일
둘이서 만나는 것은 처음 자리인지라 약속시간 보다 조금 일찍인 4시 40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 5시.. 안 온다.
이제 15분이 지나가고 있다.
그때는 선미 씨의 직장 전화번호도 모르고 휴대폰도 없었던지라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만날 생각만 했었지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15분이 지나고 나니 오지 않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맞아 선미 씨는 선유도에서부터 줄곧 나를 날강도 쳐다보듯 했는데 내가 마구 생떼를 부리니 할 수 없이 약속을 한 거고 약속 장소에 막상 나가려고 하니 귀찮고 하여 일부러 바람 맞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로 슬슬 틀을 잡아가자니 슬금슬금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5분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아이고 역시 바람맞았구먼"
축져진 기분으로 화도 풀 겸 근처에 사는 친구를 불러냈다.
알싸한 찌개에 독한 소주로 화를 달래려고 돈암동 주점에서 친구와 만나 소주로 화를 삭이고 있었다.
한참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시계를 보더니 8시 30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으니 같이 가서 시원한 맥주로 입가심을 하자고 한다.
친구가 여자친구를 만난다고 하니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원한 맥주에 이끌려 친구를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약속 장소가 하필 내가 선미씨한테 바람을 맞은 레스토랑이다.
“야 됐어... 나 그냥 집에 갈래.. 여기 내가 바람맞은 곳이야.. 기분 나빠서 그냥 집에 갈게”
하니 친구가 맥주 한잔만 더하고 가라며 굳이 끌고 들어간다.
친구에게 이끌려서 안으로 들어가니 전에 몇 번 봤던 여자친구가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체를 한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철이씨..”
“아-네...안녕하세요..”
맥주를 마시며 선유도에서 있었던 이야기부터 내가 이 장소에서 바람맞은 이야기까지 주절주절하며 거나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우산을 탁탁 털면서 조금 안면이 있는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 왔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5시에 약속을 하고 자그마치 4시간이나 지난 9시에 선미씨가 기적처럼 나타난 것이다.
눈치 빠른 친구는 다른 약속이 있다면서 여자친구와 휑하니 나가고 자연스럽게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둘이 남게 되자 늦게나마 온 것도 반가웠지만 휴가 때부터 줄곧 나를 날강도 취급을 한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도 하기 위해 조금은 비양양 섞인 말투로
“햐-대단하네요.. 대단해.. 5시에 약속하고 지금에야 나타나다니 못 올 것 같으면 약속을 하지 말던지.. 저도 바쁜 사람인데 이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말이야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을 해야지”
그러면
“아-네.. 미안합니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늦었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
라고 말을 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선미씨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 여자 갑자기 두 손으로 테이블을 “꽝” 치며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아니 누가 기다리라고 했습니까. 기다리다 안 오면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하고 가시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기다렸으면 무슨 일이 있었나, 늦게라도 와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녀요.” 하고는 우산을 챙기며 금방이라도 가려는 게 아닌가.
헐— 이게 아닌데...
“아니 아니 저도 이렇게나마 온 것이 반갑지요. 앉으세요 앉아.. 참 성격 대단하십니다.. 저녁식사는 했나요?..”
간신히 말리며 앉기를 권했다.
“웨이터 여기요 여기.. 선미씨 돈가스 아니면 햄버거스테이크?"
선미씨는 봐준다는 듯한 눈초리로 간신히 앉으며 간단명료하게 "함박 스택" 한다.
나는 첫 데이트에 날카로운 잽을 날려서 기선을 잡아보려다 강력하고 묵직한 KO 펀치를 맞으며 주눅이 들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34년간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지내고 있다.
선미씨는 내가 4시간씩이나 기다려준 정성에 감동했다며 나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내가 4시간을 기다려주었다고 믿는 아내의 감동은 1년 후 내 술친구에게 아내의 친구를 소개해 주며 들통이 나게 되고 4시간의 기다림 감동을 물어내라고 하며 그때 이 사실만 알았어도 나와의 만남을 이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나쁜 친구놈..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친구는 그때 소개 해준 아내의 친구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