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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와 잘 살기...

제13편... 내 아내를 만나다..굴절편 1화

by 이and왕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감싼다.

눈을 감고 있는데 몸이 뭔가에 실리어서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차를 탔나?.. 아니 차 느낌이 아닌데...뭐지.. 배?”

화들짝 잠을 깨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으로 몇 사람의 움직임과 하늘... 그리고 뱃머리가 보인다.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감을 못 잡겠다.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배다.

배가 바다 위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고 나는 배안에 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탁 친다.

“깼어?.. 야 몇 잔 마셨다고 잠이냐 잠은”

뒤돌아보니 정선배다.

그런데 이상하다.

생긴 것은 정선배인데 정선배가 너무 젊다.

“어.. 형님.. 형님 그런데 왜 이렇게 젊어졌어?”
“뭐야 인마.. 정신 차려.. 정신 들면 소주 한 병 꺼내와 한잔 더 하자”

내가 나를 보지는 못했지만 뭔가 낯선 나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이층 배 난간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의 여성이 보인다.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에 굵은 파마를 하고 선글라스를 낀 아주 멋진 여성... 내 기억 속의 내 젊은 아내다.

그런데 왜 내 젊은 아내가 보이지? 하는 의구심도 생기지만 순간 반가움으로 젊은 아내에게 와락 달려간다.

하지만 젊은 아내가 앉아 있는 곳 몇 발 앞에 멈칫 멈춘다.

갑자기 내 기억 속 35년 전 아내와 처음 만나던 때가 생각이 난다.

군산에서 선유도로 가는 배편... 그 위에서 처음 만났던 아내... 그 아내가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뭐야..지금...그럼 지금이 그때인가?”

지금이 그때라면... 지금 내가 그때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조금 있다가 젊은 아내에게 말을 걸 것이다.

반사적으로 아내에게 다가가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가야 하나?

그 옛날 아내를 처음 만날 때처럼 아내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

아내와의 만남 이후의 시간이...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다.

내가 지금 말을 걸면 젊은 아내는 35년 전 그때처럼 말을 받아서 이어갈 것이며 그 이후 인연이 되어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을 걸지 않으면 어쩌면 영원히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주저함이 몸을.. 생각을 망설이게 하고 일단 두고 보게 만든다.

일부러 젊은 아내의 옆이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젊은 아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젊은 아내는 나를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또는 신경 쓸 대상이 아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의 존재에 대해서 무신경하다는 느낌이다.

결혼하여 살고 있는 아내였다면 팔짝 뛰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을 텐데... 젊은 아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은근히 화가 난다.

젊은 아내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아내의 친구 현숙과 세은 씨가 다가와 젊은 아내에게 말을 걸며 한바탕 즐겁게 웃는다.

다시 젊은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간다.

하지만 젊은 아내는 물론 두 친구들도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당연한데 왜 이렇게 섭섭하고 서운한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말만 걸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하겠노라고 다짐을 하며 모든 것을 같이하는 부부사이가 되는 절대 인연인데 아직은 완벽한 타인의 관계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아내와 친구들이 선실 안으로 사라진다.

아내와 같이 한 34년간의 생활은 누구나가 그러하듯 그런 정도의 또는 보다 치열한 싸움도 있었고 누구나가 경험한 정도 또는 그 이상의 행복을 가지며 살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결혼 한 아내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아내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 와 있다. 그리고 아내와 인연을 맺던가 아니면 영영 남으로 살아가 던가를 결정해야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아내와 인연이 되는 날...그날 그 시간에 내가 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나...

젊은 아내는 현재 나의 눈에도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

지금 이 순간 현재 배 위에서 젊은 아내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 나의 미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머뭇거린다.

머뭇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였다.. 바람의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그러면서도 나한테 정확한 메시지가 전달이 된다.


“앞으로 이틀... 이틀이 지나면 당신의 미래는 리셋이 된다.”

“뭐지?... 이틀 뒤에 리셋이 된다고?”

시간을 보니 오전 10시다... 리셋 48시간 전

“그럼 이틀이 지나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아내와의 기나긴 여정은 다 없어진다는 건가?”

“뿌—웅”하고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진다.

배가 선유도 선착장에 다다른 모양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지금 말을 걸지 않으면 젊은 아내는 나라는 존재를 모른 채 배에서 내리게 될 텐데 어떻게 하지... 하는 조바심이 들기 시작한다.

“야 정신 차려.. 정신.. 빨리 내릴 준비 해.. 배낭 챙겨라..”

멍하니 있는 나에게 정선배가 큰소리로 나를 깨운다.

배가 선유도 선착장에 닿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나도 내리며 젊은 아내가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안 보인다.

젊은 아내와 친구들이 안 보인다.

아내를 찾지 못한 채 예약해 둔 민박집으로 향한다.

민박집에 들어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지만 젊은 아내와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냉정해지자... 리셋 46시간 전

배 위에서 젊은 아내를 보고 왜 말을 걸지 않았을까?

말을 걸어야 아내와 같이하는 삶을 살아갈 텐데 왜 머뭇거렸을까?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행복한 느낌이 더 크고 행복한 일이 불행한 일보다 더 많았다.

아이들도 둘 다 잘 자랐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머뭇거려진다.

일단 머뭇거림은 싫고 좋음과는 관계가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점심밥을 해 먹고 망주봉으로 향했다.

앞전 기억에는 망주봉은 아내하고 같이 올라갔었는데...

망주봉 위에도 젊은 아내는 없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작년에 아내하고 결혼 33주년 기념으로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코등이 찡하게 그리움이 몰려온다.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리셋 38시간 전

민박집 내부에 있는 우물가 옆에서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3명의 여성들이 발랄한 웃음과 이야기를 나누며 쌀을 씻고 있다.

나도 그녀들 옆에서 매운탕을 끓이기 위해 포구에서 사 온 물고기를 손질을 한다.

“안녕하세요. 혹시 그 생선 파는 건가요?”

세명 중 한 여성이 나에게 물어 온다.

내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헐렁한 나시티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현지 어부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아뇨.. 우리가 끓여 먹으려고 사온 건데요”

“어머머... 그래요.. 저는 생선 다루는 솜씨가 좋으셔서 어부신줄 알았어요... 호호호”

“........”

“놀러 오셨나요? 어디서 오셨어요?”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참 말도 많고 활달하기 그지없는 아가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가씨들은 어디서 왔어요.. 세 명이서 오신 건가요?”

그때 정선배가 쌀을 코펠에 담아서 우물가로 다가오며 되려 물었다.

“우리요?.. 우리는 수원이요.. 수원.. 맞아요 우리 친구들 세 명이 왔어요”

넉살 좋은 정선배 덕분에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하게 되었고 저녁도 같이 먹게 되었다.

저녁식사 시간.... 리셋 36시간 전

우리가 끓인 얼큰한 매운탕과 아가씨들이 만든 떡볶이와 어묵탕이 중간에 놓였고 왁자지껄 들뜬 기분으로 소주를 마신다.

문득 35년 전 이 자리가 생각이 난다.

만약 배에서 젊은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래서 그때처럼 우리가 묵은 민박집으로 같이 왔다면 이 자리에는 젊은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젊은 아내는 다른 곳으로 갔다.

그 대신 그 당시에는 없었던 세명의 아가씨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운명인가?.. 이곳이 내 짝을 만나는 운명인가?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있는 세명의 아가씨들 중에 한 명과 나는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

그럼 내 아내는? 내 아내의 운명은?

술이 취한다.

취하면서 유독 지혜라는 이름의 여성과 말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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