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aarami’s Diary(21)
12월 21일
신라면 하나, 짜파게티 하나, 배홍동 하나 주세요.
주문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감격에 겨워서다.
있는 라면을 (불닭볶음면은 빼고) 종류별로 다 샀다. 새우깡도 샀다. 스리랑카에서의 남은 시간을 버티게 해 줄 에너지원을 얻은 기분이다.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쉬운 사람이다. 라면 15개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라니.
지난 17일에 콜롬보의 한 호텔에서 스리랑카한인회의 송년회가 열렸다. 송년회를 시작하기 앞서 바자회를 열었다. 판매 품목은 라면, 과자, 고추장, 된장, 참기름 등의 식료품이었다. 마트에서보다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었다. 한 달 전 바자회 소식을 들은 날부터 내 신경은 온통 바자회에서 팔 라면에 쏠려있었다. 이날 무사히 라면을 사면 내 크리스마스 소원이 생애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바자회는 4시부터 시작했다. 나는 2시부터 콜롬보에서 대기했다. 3시가 조금 넘어서 행사장으로 갔다. 행사 준비로 바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목표물을 포착했다. 라면을 사겠다며 그토록 일찍 도착한 내가 너무 탐욕스러워 보이지는 않을는지 걱정했지만 교민분들은 친절하게 라면을 내어주셨다. 라면과 과자를 6천500루피에 샀다. 2만 6천 원이다. 와, 싸다.
내 올해 마지막 할 일은 라면을 싸게 사서 집에 쟁여놓는 것이었다. 과거 라면과의 친밀도를 생각하자니 도저히 한 봉지에 5천 원을 주고는 살 수가 없었다. 유년기에 잠시나마 동생과 생라면을 부수어 먹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 이후로는 라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30대 이후로는 1년 동안 손으로 꼽을 정도로만 먹었다(라볶이는 예외). 스리랑카에 올 때도 라면을 챙기지 않았다.
그런데 스리랑카에 오니 라면이 최고다. 몸이 아플 때 먹는 보양식이고, 생일날 챙겨 먹는 특식이다. 한 그릇 비우면 세상 든든하고 뱃속이 따뜻해지는 소울프드, 영혼을 달래주는 누들 스프라서 최소한 한 봉지는 집에 두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드래곤볼의 선두, 호랑이 형님의 단약과 같은 존재다. 내가 이토록 라면에 집착하게 될 줄이야.
나를 애태우는 또 다른 식재료는 쌀이다. 어릴 적 나는 갓 지은 쌀밥을 좋아했다.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 단맛이 우러나는 것을 느끼며 한참을 씹었다. 그래서 밥 먹는 속도가 느렸다. 어른이 되고서는 그렇게 먹을 수 없었다. 빨리 먹어야 했다. 그렇게 밥이 지닌 달콤함을 잊었다. 쌀을 산 적이 없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는 빠르고 편리한 햇반을 먹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한국쌀을 사려고 애를 썼다. 스리랑카산 쌀은 값이 매우 싸다. 그런데 맛이 없다. 찰기가 없는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맛도 없다. 맛이 나쁜 게 아니라, 없다. 두어 달 전, 한국식당에서 10kg짜리 쌀을 일정 수량 팔았다. 1시간 컷 선착순이었다. 가격은 한국돈으로 12만 원이다. 12만 원. 하아....
샀다. 혼자는 못 사고 동료 선생님이랑 같이 사서 반을 나누었다.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면서 아껴 먹고 있다. 쌀 한 톨도 버리지 않는다. 새로 밥을 지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는다. 이건, 향수인지 퇴화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라면을 쟁였다. 2주에 하나씩 먹으면 4달 가까이 먹을 수 있다. 그러면 곧 한국에 돌아간다. 1월 1일에 라면을 먹을 것이다. 2월 10일에도 먹을 것이다. 3월 1일에도 먹고, 5월 5일에도 먹어야지. 입에 잔뜩 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