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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혁 Oct 10. 2022

깔리's 로컬 이야기

[로컬향기 1]

*본글은 함양 어느 로컬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는 깔리님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Q1) 할아버지와 로컬의 관계가 있나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어릴적부터 남달랐던 성격이 큰 계기가 되었나 봅니다. 저는 20대 후반 청년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일종의 기초수급자라고 하지요. 전 평생 이 말이 지옥이었습니다. 사회가 정해놓은 인간의 등급에 의해 저의 인생은 갈팡질팡해버렸지 뭡니까.


아니나 다를까, 학창시절 친구들과 일탈을 자주 행하여 결국 소년원까지 다녀왔습니다. 촉법소년, 말은 달콤하지만 그 이면에는 저와 같은 아픈 사람들이 많기에 이 글을 요청했던 이유였고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연희동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저 멀리 타지 함양에 있습니다. 저 멀리 함양에서 업무가 끝난 후 손님들이 건네준 인삼사탕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Q2) 촉법소년은 사회가 정해놓은 편견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느 드라마를 보면 김혜수 누나가 판사가 되어 일탈한 친구들을 갱생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사실 전 그런 드라마를 보고 사회적인 차별이라고 느꼈습니다. 고의와 의도에 의한 일탈 행위는 당연히 잘못된 거라고 봅니다. 물론 제 친구들은 그중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전 그 그룹에 끼고 싶지 않았던 학창 시절이었습니다. 제 곁에는 부모님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제가 전부였고요.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전 무지 힘들었던 나날의 연속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의 잘못된 이 일탈이 한핏줄에 부정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소년원까지 다녀왔고 전 그 과정에서 많은 시련과 고난을 이겨냈고 특히 어린 시절부터 빠르게 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분들을 위해서 말이지요.


Q3) 그래서 깔리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변화점이 있었나요?


할아버지는 폐지 줍는 일용직이셨고요, 할머니는 그저 기사식당의 어느 주방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3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셨고요. 그 이후로 할아버지도 여느 때와 다르게 부쩍 힘들어하셨어요. 건강 상태 악화가 심각해지자 전 병원비를 모으기 위해 다양한 알바를 찾기 시작했어요.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판촉도우미, 어느 대기업 환경미화원, 그리고 세미나 컨퍼런스 알바까지. 참으로 다양했어요. 물론 많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생각은 딱 하나.


'무조건 할아버지를 살려야낸다.'


그리고 촉법소년이라는 사회적인 시선을 탈피하고 저만의 올바른 생각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한부모가족 살리기 프로젝트>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피피티와 한컴 등 사무직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과연 내가 이 어린 나이에 무엇을 행할 수 있을까?' 스스로 고민이 많았답니다. 그리고 무작정 택했던 저만의 방법은 하나, 바로 '기초수급자를 위한 마을 만들기'프로젝트였습니다.


Q4) 기초수급자를 위한 마을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죠?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20대 초반에 알바를 병행하면서 우연히 저와 같은 생각을 지닌 형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형은 자신만의 마을을 만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취지는 좋았지만 가장 중요한 '돈'이 우선이었어요. 그렇게 저희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끼리 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지자체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였어요.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동사무소 직원이 저희의 그러한 고된 모습을 보고 직접 사무적으로 처리하도록 요청했나 봅니다. 하지만 예산 부분에 있어서 큰 타격이 생겼어요. 믿지도 못할 너희들에게 굳이 이 예산을 다 줄 필요가 있냐며, 그건 사회적인 편견을 남용한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의미였어요.


"그럼 우리가 그 사회적인 편견을 깨면 되잖아요!"


이 말 한마디에 고위 공무직 한분이 헛웃음을 치던게 보였습니다. 비웃음 당연할 수 있어요. 언제나 그분들은 현실만 보니까요.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그렇게 무작정 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할아버지, 만약 내가 저 멀리 어느 지방에 가도 할아버지를 기억 못 한다면 난 나쁜 놈이지? 그치?"


"그리고 할아버지, 난 우리와 같은 아픔이 가득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할아버지의 건강을 다시 되찾아주기 위해 잠깐 떠날거야."


"아니야 할아버지, 우리 그냥 같이가자. 폐지 그만 주워도 된다. 잠시만 기다려줘."


이 말을 서슴지 않게 했던 이유는 그때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에요.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때 그 말을 토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그때 할아버지의 유품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을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더 멋진 손자가 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행하는 더 멋진 사내가 되기 위해 해당 지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부모가족 살리기 프로젝트>는 이미 저에게 끝난 거와 다름없었습니다. 전 이제 한부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력을 주지 않으려고 꽤 노력했어요. 그렇게 저만의 공익 활동이 점차 끝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크나큰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저희가 맡았던 기초수급자를 위한 마을 사업 계획서가 겨우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컨펌이 난 상황에서 저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그 시간 이후 2년이 훌쩍 지났고, 전 현재 함양에 있습니다.


Q5) 그럼 현재 함양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나요?


몸이 불편한 사람, 거동불편자, 그리고 장애인 특별 보호법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이슈 홍보물을 만들고 언론에 알리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는 대중적이지 않은 사회적 단체이기에 그 과정에서 무모한 일도 참으로 많았던 거 같아요. 거동불편자들을 위한 사회복지문화시설을 만들기 위해 허름하고 낡은 집들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산속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 새벽동안 내내 저렴한 집들이 어디 있는지 몸으로 직접 뛰어가기도 했지요. 젊음의 패기가 여기서 느껴졌던 스무살 중반이었어요. 물론 지금은 어느 저렴한 공방을 여러개 이어서 기초수급자 및 장애우들을 위한 시설로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양 군수 귀에 들어가 상장을 받기도 했어요! 드디어 5년 넘게 행했던 프로젝트의 첫 선물이라고 보면 될 듯하네요. 지금은 함양의 어느 분교를 캠핑장으로 리모델링하려고 사업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캠핑장은 함양군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을 홍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힘들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오겠죠.


Q6) 할아버지가 기뻐하시겠어요. 이렇게 타지에서 변화한 손자를 본다는 게 말이죠.


할아버지, 할머니 집이 현재 연희동에 있는데 언젠가 그곳을 리모델링하여 깔리의 연대일대기 아카이빙 작업실로 만들 예정입니다. 물론 지금 연희동 일부 구역이 재개발 권한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 때문에 서대문구와 자주 소통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아픈 사람들이 더 이상 끙끙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게 바로 로컬에서 발견된다고 봅니다. 로컬은 그냥 사람의 정입니다. 그리고 저와 이러한 부분 소통해주신 갓혁님 감사드립니다.





ps.

어릴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자신의 변화가 다가왔고 사회 변화로 이끌고 싶었던 깔리님.

어쩌면 우리가 로컬을 사랑하는 이유는 어릴적 그때 추억 이면에 잠긴 부정적 감정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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