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두 미소

by 산속

4.

재하는 내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내 차가워진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언제나 그랬다. 재하는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는 모른 척 덮어주었고, 내가 숨이 가빠 보일 때면 조용히 곁을 지키며 숨 고를 시간을 주던 사람이었다.


“길을 물었으면 대답은 들으셨을 테니, 이만 가보시죠. 이 친구가 지금 좀 피곤해서요.”
재하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도현은 재하에게 잡힌 내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까의 여유롭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도현의 눈빛은 서늘한 겨울 바다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피곤한 게 아니라, 겁이 난 거겠지.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오늘은 아닙니다. 우리 씨는 지금 휴식이 필요한 상태거든요.”
재하는 도현의 도발을 너른 마음으로 받아쳐 냈다. 마치 거센 파도를 묵묵히 받아내는 바위처럼. 도현은 헛웃음을 삼키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끝까지 나를 놓지 않았다.


“한우리, 내일 다시 올게. 네가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널 알거든. 네가 어떤 순간에 숨을 멈추는지까지 전부 다.”
도현이 돌아서서 멀어지는 동안, 재하는 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그의 넓은 품 안에서 겨우 심장 박동이 잦아들 무렵, 재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 많이 흔들렸어?”
그 질문은 가시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상처에 닿는 부드러운 약솜 같아서, 나는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재하의 다정한 물음에 결국 억눌렀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너머로 도현의 멀어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뒷모습을 잡는 대신, 내 어깨를 감싼 재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미안해, 재하야.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우리야..."
​"흔들렸어. 그 사람이 하는 말들이 가시처럼 박혀서, 바보같이 또 아파하고 흔들렸어."

​나는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이내 차갑게 식어갔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전과는 다른 단단한 빛이 서렸다. 나는 재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장 낮은 목소리로 진심을 뱉어냈다.

​"그런데 이제 안 해. 그 사람이 내 숨을 쥐락펴락하게 두지 않을 거야. 나한테 진짜 숨을 쉬게 해 준 건, 그 사람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있어 준 너였으니까."
​내 고백에 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동안 묵묵히 기다려온 그에게 줄 수 있는 나의 가장 큰 보답이자 결심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도현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했다. 이제 내 얼굴엔 눈물 자국만 남았을 뿐, 표정은 겨울바다보다 더 냉정하게 굳어 있었다.


​"내일 다시 온다고 했지. 오라고 해. 내 입으로 직접 끝내줄 테니까."
​재하는 말없이 내 손을 꼭 맞잡아주었다. 그의 넓고 따뜻한 손바닥이 전해주는 온기가 나의 차가운 결심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도현의 미소는 나를 흔들지 못할 것이다. 내일,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마주할 것은 '흔들리는 우리'가 아니라, '가장 냉정한 한우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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