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 형태와 인공적 수공업자/자연적인 행동과 자연적 수공업자.
오늘 또다시 ‘현대미술’에 관해서 생각해보았다. 지난날 현대 미술에 관한 담론을 나누었을 때 간단히 현재의 ‘나 : 내’가 미술을 하니 현대 미술이지 라고 아주 가볍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길, 현대미술이란, 무의식의 상품화처럼 알맞은 테마가 있을까.
이를 대변하듯, 동료 작가의 작품이었던 ‘종이접기 : 오리가미’ 작품이 생각이 난다. 테마는 위에 언급한 무의식의 상품화. 과거와 현재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불과 내가 어렸을 때와 그 이전의 과거에도 그렇게 시대는 무한정 변화된다. 나 또한 어린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도 어린아이들이 더욱더 경제적인 부분에 투철함을 느낀다. ‘돈’에 맹목적으로 변화되는 현상.
그것이 과연 지금의 시대상의 문제인지 또는 교육의 문제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요새 아이들의 장난감과 교육 프로그램인 노트북형 교육 자료를 보면 퀴즈를 풀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상품의 정답의 답례로 ‘무엇’ 가의 상품을 준다. 또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정답의 결과물로써 프로그램 ‘돈’이 생겨난다. 그럼므로서 이것이 즐거운 유희이지 경제적인 교육인지 고민하게 되며 거의 ‘세뇌’에 가까운 강박 관념을 생성하는 것인지 힘들기 시작했다.
나는 예술을 전공하며 또 다른 고민에 휩싸일 때가 있다. 또 다른 동료 작가의 작품은 외관의 형상이 타자의 작품과 유사하다. 동료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손재주’와 ‘놀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럼으로써 다른 누구가와 복제하지만 복제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복제이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다르다. 결국 ‘손재주’와 ‘놀이’는 우리가 많이 하는 ‘모방’이며 ‘답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부분에서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길, 현대 미술이란, 단지 시대를 대변하고 결과물로서 ‘재조합’,’ 변형’의 형태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또한 우리는 그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에 사로 잡힌다.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라면 또 다른 누군가도 ‘이렇게 생각한다.’
4월 22일 : 인위적 형태, 인위적 수공업자 그리고 자연적인 행동과 자연적인 형태와 자연적인 수공업자의 차이.
나는 오늘 생각했다. 내가 만약 이것을 작업으로 진행할 경우.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할지 생각해보며 뱅크시의 작품처럼 ‘무엇을 모방하기’ 또는 ‘작품의 일환이 되어보기’
오늘날 생각해보길, 현대 사회에서는 제사와 같은 과거의 모습들이 점차적으로 사라진다. 조상의 차례는 치러지지 않는다. 그것 또한 과거의 일이며 과거에는 익숙하고 당연하던 것들이 이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의 방법에 관해 생각해본다. 첫 번째, 형상이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를 예술로서 생각한다면 하나의 가정 안에서 필요한 부분은 우선적으로 재료를 선택한다. 이를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재료를 정리한다. 나는 단순히 1차원적이게 표현하여 모래를 통해서 설치 미술을 할 것 같고 자연적인 염색의 동양적인 방법을 응용할 것 같다. 이를 설명하면 ‘신은 죽었다.’
두 번째,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한다면 신문지를 꾸기고 양초를 덮고 모래로 글을 쓰고자 한다. 이는 텍스트로서 작품이 제작되는 것이다. 또한 이를 설명하면 ‘신은 죽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와 생각하길 형식화한 형상이 있는 무언가 인위적 형태로서 무언가 인위적인 수공업자처럼 제작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과거에 집에서 제사에 참여해보며 붓으로 과거의 기억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적은 종이를 앞에 두고 인사하고 나중에 밥을 먹었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스트레스로 다가왔지만, 후에 생각해보길.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는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였다.
정말로 자연적인 것이라 하면 바로 이것처럼 무언가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것이 아닌 자연적인 형태처럼 자연적인 수공업자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에 언급한 과거의 일이 너무나도 자연적이게 지속적으로 이뤄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