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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10. 2023

시월에 떠난 오월이

흰샘의 그저 그런 이야기들

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전주에 있는 한국고전번역원 전주분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하여 한겨울이 되었으니 꼬박 4계절을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 조용히 아침을 챙겨 먹고, 지하철 타고, KTX 타고, 버스 타고 오가는 길이 나는 힘들다기보다는 늘 즐거웠다. 무엇보다 매주 변해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과, 여전히 맛있는 전주의 음식, 나의 허접한 강의를 기껍게 들어주는 수강생들, 그리고 오래된 도시 전주의 오래된 것들이 나는 좋았다. 열차 안에 있는 시간은 오롯이 내 시간이라, 가끔은 그런 풍경과 생각들을 모아 글을 쓰기도 했으니, 내게 전주행은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내가 강의를 하는 곳은 전주 한옥마을 한복판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분원까지 가는 길에는 전동성당과 경기전이 있다. 언제 보아도 거룩하고 엄숙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경기전 앞의 가로수들에 모두 겨울옷을 입혀 놓았다. 직접 뜨개질을 하여 가로수의 가슴께에 둘러놓은 털옷들은 보기만 해도 따스하다.     

경기전 앞의 가로수들은 모두 겨울옷을 입었다

오늘은 수업 시작 전에 이미자의 ‘여로’라는 노래를 함께 들었다. 가사가 참 좋은 노래다. 특히 2절에 나오는 ‘볼우물 예뻤을 때’가 그렇다. 왜 ≪시경≫에도 미인을 표현하는 구절로 ‘巧笑倩兮(교소천혜: 아름다운 웃음에 보조개 지고)’라는 시구가 나오지 않던가! 이렇게 노래 하나, 시 한 수 함께 듣고 읽는 일은 자칫 지루하고 빡빡하기 십상인 강의에서 간혹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수업이 끝나고 사무실에 있는 두 청년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분원 근처에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두어 군데 있는데, 그중 ‘신○○’는 늘 수강하는 분들이 많이 가는 곳이다. 거기 가서 그분들을 만나면 서로 점심을 사 주겠다고 나선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그러면 나로서도 부담이 된다. 그래서 그들이 잘 가지 않는 김치찌개 전문점 ‘○○사랑’에 가곤 한다. 오늘은 하필 그곳에도 수강생들이 세 분이나 있어 난감했다. 일단 직원들과 김치찌개 셋을 시켜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산을 하려는데 수강생 한 분이 어느새 계산을 해 버렸다. 내가 차(茶)를 사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대신했다.     

찻집 '오뉴월' (네이버 블로그 갈무리)

찻집 이름이 ‘오뉴월’이었다. 그 거리를 몇 번이나 지나면서도 나는 그곳이 찻집인 줄 몰랐다. 함께 간 수강생 한 분이 들어가자마자 ‘오월이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초로의 여주인은 먼 곳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무슨 소린가 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찻집에는 오월이와 유월이 등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단다. 그래서 찻집 이름도 오뉴월이라고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어 유월이가 먼저 떠나고 오월이마저도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올 때 보니 찻집 한쪽 벽이 온통 오뉴월의 사진과 그 아이들이 남기고 간 간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심지어 오월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주인이 오월이의 마지막을 남기고 싶어서 매일 사진을 찍었겠구나 짐작을 했다.

오월이(네이버 카페 갈무리)

주인은, 오월이가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 그 좋아하는 간식도 먹지 않고, 물만 조금씩 마시다가 그마저 끊고는 조용히 떠났노라고, 눈물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오월이가 마지막으로 눈을 뜨고 숨을 쉴 때 찍은 사진 옆에는 누군가의 시가 함께 붙어 있었다. 짧지만 참 잘 쓴 시였다. 그 찻집 단골인 누군가가 지어 주었단다. (아마 11월을 10월로 잘못 알아들었는지 제목이 ‘시월에 떠난 오월이’였다.)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시를 보다가 문득 김사인 시인의 ‘좌탈’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로 시작하여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로 끝나는 그 시가 어쩌면 그리도 오월이의 마지막과 닮았는지 놀랐다. 주인에게 그 시를 꼭 찾아 읽어보라고 전해 주었다. 주인은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김사인’과 ‘좌탈’을 되뇌었다. 다음번에 가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월이와 유월이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어 보아야겠다.

오월이의 마지막 모습과 '시월에 떠난 오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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