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파트 옥상에 화분 몇 개를 올려놓고 ‘텃밭’을 가꾼지가 15년쯤 되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부터 아파트에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는 바람에 잠정적으로 ‘폐농’을 했다. 화분도 절반은 버리고 흙도 다 쏟아 버렸다. 봄이 되자 다시 내 유전자에 인자된 ‘농심’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아파트는 아직도 ‘공사중’이지만 뭐라도 시작해야 했다.
1. 냉이
일단 상자처럼 생긴 화분에 지난여름에 받아둔 냉이 씨앗을 뿌려 보기로 했다. 냉이야 아무 데서나 워낙 잘 자라니까 아마 씨앗도 발아를 잘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냉이는 나의 믿음대로 모조리 싹이 나서 화분을 가득 채워 버렸다. 일부를 솎아서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두 화분을 다시 가득 채웠다. 나물처럼 여린 냉이를 몇 번이나 솎아서 냉잇국을 끓여 먹었는데, 앞으로도 10번은 더 냉잇국을 먹을 수 있겠다. 아, 위대할손 나의 믿음이여!!
2. 상추
나는 상추를 항상 씨앗부터 시작한다. 모종을 사다가 심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씨앗은 고향에 갈 때 농협 공판장에서 사거나 전주에 갈 때 남문시장 종묘상에서 산다. 서울에서 파는 것은 씨앗도 변변치 않다. 생업과 취미의 차이는 상추씨 하나에도 그 현격함이 존재한다. 흙을 잘 골라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뿌려 주고, 첫싹이 언제 나오는지를 기다리는 것은 아침마다 설렘을 준다. 매일 아침을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1년 중 며칠이나 될 것인가? 한 달 전에 뿌린 씨앗이 드디어 싹이 트고, 간간이 내리는 봄비를 맞아 제법 상추의 모습을 띄기 시작하는 모습은 벅찬 감동을 준다. 요즘은 상추 모종도 비싸서 도시에서는 2~3포기에 천 원씩 한다. 씨앗은 2천 원짜리가 최소 2천 립(粒) 이상이니 씨앗 하나에 1원인 셈이다. 가성비 때문에도 나는 편한 모종 대신 귀찮고 오래 걸리는 씨앗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쫀쫀함이여!!
3. 바질
나는 수년 전까지 바질이 뭔지도 몰랐다. 알았더라도 나와는 관계 없는 식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지인에게서 바질로 만든 잼 같은 것을 선물로 받아왔다. ‘바질페스토’라 이름하는 것이었다. 먹어보니 독특하고 고급진 것이 내 취향과 수준에 딱 맞았다. 아내는 작은 화분에 심어진 바질도 두 포기 얻어왔다. 큰 화분에 옮겨심고 바질 기르는 방법을 검색하여 그대로 했더니 잘 자랐다. 잎을 따서 바질페스토를 서너 병이나 만들고, 한 그루는 잘 키워 씨앗을 받았다. 이듬해는 씨앗을 뿌려 발아를 시켰다. 바질은 20그루로 늘어났고, 아침마다 밥 대신 빵을 먹는 우리 부부는 1년 내내 빵에 바질페스토를 듬뿍 발라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당연히 올해도 36구짜리 묘판에 바질 씨앗을 심었다. 바질은 지중해에서 자라는 식물인지라 따스한 온도와 풍부한 햇볕을 필요로 한다. 우리집 발코니는 햇볕은 충분한데 아직 바질이 잘 자랄만큼 기온이 높지는 못했다. 그래도 서두른 것은 작년에 만들어 놓은 바질페스토가 바닥을 보인 까닭이었다. 아무려나 바질은 이름처럼 바지런하지 못하고,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점순이 마냥 도대체 자라질 않았다. 4월 들어 날이 점점 따스해지자 그제야 떡잎 위에서 본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놈들을 또 잘 키워 독특하고 고급진 나의 취향과 수준을 마음껏 즐겨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