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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May 04. 2024

폐농(廢農) 일기

지난여름부터 시작된 아파트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옥상 방수공사부터 시작하여 외벽 페인트 공사, 그리고 엘리베이터 부품 교체 공사까지, 공사는 계속 이어진 것도 아니고 간헐적으로 시작했다 끝마치곤 했다. ‘덕분에’ 15년 넘게 가꾼 옥상 텃밭은 하루아침에 쑥밭이 되었다. 수많은 화분과 흙을 일일이 다 내리는 것도 아파트 공사 못지않게 내게는 대공사였다. 인간의 역사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었지만 파괴하고 없애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당연히 그에 필요한 도구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름대로 친환경 농사를 짓는답시고 비가 오면 홈통으로 내려오는 빗물을 받아 저장해 두기 위해 100리터짜리 물통을 떡 하니 가져다 놓았으며, 비싸게 산 흙이며, 마사토, 거름 등도 계단참에 쌓아 두었다. 그뿐인가? 여기저기서 사거나 주워 온 화분과 화분 받침들도 잔뜩 쌓아놓았고, 그밖에도 물뿌리개, 바가지, 꽃삽들, 지지대로 쓰기 위한 길고 짧은 막대들, 각종 끈들, 가위와 칼, 모종판, 겨울 방한을 위한 비닐과 헌 돗자리, 비 올 때 필요한 우산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쌓아 두었다. 모두 꼭대기 층에 사는 자가 누리는 특혜요 호사였다.


새로 부임한 여자 관리소장은 매우 꼼꼼한 원칙주의자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각 층마다 한 대 정도는 묶여있는 자전거를 치울 것을 명하는 딱지를 붙였다. 차압 딱지보다 크고 무서운 붉은색 딱지였다. 원칙주의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 나는 아들 녀석이 타다가 방치해 놓은 자전거를 그날로 치웠다. 이번에는 소방법을 들먹이며 경비 아저씨를 통해 나의 모든 물건을 치울 것을 명했으며, 나는 그것도 두말없이 실행에 옮겼다. 


문제는 너무 물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화초들이 심어져 있는 화분들은 집안 발코니에 가져다 두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나머지 물건들은 8할은 버렸다. 어차피 옥상에서 농사를 짓기는 틀렸으니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거니와 둘 곳도 없었다. 너무나 아까운 것들이 많았지만, 모두 필요한 사람들 가져가라고 나름대로 잘 닦아서 경비실 앞에 내놓았다. 다행히 쓸만한 것들은 누군가 가져간 모양이다. 특히 커다란 상자 화분과 중간 크기의 상자 화분은 8층 어르신이 이미 가져다가 파를 심어 놓았다. 


우리 동에는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다. 하여, 공사를 할 때는 하나를 교대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건너편 라인에 사는 이들이 우리 라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옥상을 통해 건너편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 라인 공사할 때도 그런 식으로 한다. 사실 페인트 작업을 끝나고 상당수 화분들을 다시 옥상에 올려놓았던 터였다. 그런데 생전 오갈 일이 없던 옥상이 통로가 되면서 그걸 시기하는 ‘주민’이 있었나 보다. 관리소장이 하는 이야기이다. 핑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옥상의 화분들과 계단참의 물건들을 치우라는 것은 ‘민원’ 때문이라 했다. 아무튼 나는 그것들을 두말없이 치웠으니 서로 시비할 일은 없다. 


 그랬는데... 오늘 아침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화분을 처분하면서도 지난 3월에 씨앗을 뿌려 한창 쑥쑥 크고 있는 상추 화분을 버릴 수 없어 그것과, 나중에 모종하기 위해 나머지 두 개의 화분을 지하주차장 위 풀밭에 모셔놓았다. 비싼 상토를 사다가 붓고 바로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할 수 있게 잘 골라 놓은 것은 물론이다. 입구 크기가 한아름이나 되는 고무 화분도 아까워서 3개만 가져다가 고추를 한 그루씩 심어 놓았다. 올 ‘농사’는 딱 그만큼만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나마 그런 공간이 주어진 것에 한없는 감사와 안도의 마음을 품고 말이다. 


씨앗부터 뿌려 키운 상추가 너무 무성하여 적당히 솎아서 나머지 빈 화분에 모종을 하려고 내려갔다. 그랬더니 누군가 그 빈 화분에 상추인지 배추인지를 모종해 놓았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누가 봐도 그건 버린 화분이 아니고, 더구나 곁에는 똑같은 화분에 상추가 자라고 있는데 거기다가 자기 것을 심어 버린 것이다. 이거야말로 오목눈이가 애써 지어놓은 집 안에 제 알을 몰래 낳아놓고 도망간 뻐꾸기와 다름없는 일 아닌가? 마침 곁에 있던 경비 아저씨도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8층 어르신일까? 그런데 마침 그 어르신이 내려오신다. 얼른 쫓아가 물었더니 자신은 아니란다. 오히려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내 역성을 심하게 드신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올라와 두꺼운 비닐에 매직으로 이렇게 써서 화분에 꽂아 두었다. “주인이 있는 화분입니다. 여기에 모종한 것은 다시 뽑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5월 4일까지 뽑아가지 않으시면 제가 다 뽑아서 버리겠습니다.” 그 옆의 화분에도 주인이 있는 것이니 함부로 다른 것을 심거나 훼손하지 말라고 ‘점잖게’ 적어 붙여 놓았다. 하지만 마음은 절대로 점잖아지지 않았다. 사실 엊그제도 그 화분 옆에 고이 놓아둔 꽃삽(심지어 접이용 야전삽이다)이 하나 없어졌으며, 심지어는 옆 라인 어느 할배가 내가 텃밭 일할 때 쓰는 접이용 의자를 가져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내 것과 똑같이 생겼는데 그냥 같은 것일 수도 있어 바로 가서 따지지 못하고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이 분할 뿐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돈 주고 산 화분 몇 개도 누군가 가져갔다. 15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들이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공연히 화분 몇 개 놓고 소꿉놀이 같은 농사를 한답시고 이웃에 대한 불신과 미움만 키우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이놈의 노릇을 당장 다 때려치울까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우리 집 뒷 발코니에 나가면 창문을 통해 내 화분이 있는 곳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몇 번이나 발코니에 나가 내려다보았지만 그대로였다. 아무려나 나는 하루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내가 보더니 그 화분에 써서 꽂아 둔 경고문 내지 호소문의 내용이 나 답지 않게 좀 과격하다고 했다. 내가 다시 읽어 보니 그랬다. 그냥 좋은 말로 ‘뽑아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안 뽑아가면 다 뽑아서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그걸 보면 화가 날 것이었다. 격분 상태에서 저지르는 일은 늘 그렇다. 나중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뽑아서 버릴 생각은 1도 없었다. 어찌 생명을 함부로 그렇게 하겠는가? 잘 뽑아서 작은 화분에 옮겨 심어놓고 찾아가라고 안내문을 하나 더 붙이려 했다. 그런데 오후에 운동을 하고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보니 화분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 과격한 격문을 보고는 바로 뽑아간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미안해질 차례였다. 우선 격문이 너무 과격하고 무례했다. 그리고 기왕 그렇게 된 것, 나머지 하나에 내 상추를 적당히 옮겨 심고 그냥 같이 물 주면서 키웠으면 어땠을까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오목눈이보다도 못하다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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