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平線

by 흰샘

내 고향 고창에 있는 선운사는 꽃의 절이다. 봄이면 절집 뒷산에 동백이 절정을 이룬다. 동백은 시들지 않는다. 절정일 때 스스로 제 목을 자른다. 아직 나무에 목숨을 붙이고 있는 동백이 절반, 땅에 뒹구는 동백의 시신이 절반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시신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동백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사실 선운사의 봄은 동백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대웅전 옆 화단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수선화는 어떠하며, 도솔암 언덕에서 청초하게 피어나는 하얀 목련은 또 어떠한가.

선운사의 목련과 동백. 바닥에 치렁치렁한 것이 꽃무릇 잎들이다. 저 잎이 완전히 사라지야 꽃대가 올라온다.

여름에는 배롱나무가 장관이다. 8월 염천이 되어야 만세루 앞 뜰에 서 있는 배롱나무에 꽃이 만발한다. 초파일에 무수히 걸린 연등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꽃등이 켜지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대웅전 앞에도 두 그루가 있다. 우리는 어릴 때 그 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 불렀다. 나무 둥치를 손톱으로 조금만 긁어도 모든 가지가 흔들렸다. 우리는 그것이 나무가 간지럼을 타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어른들은 쌀밥나무라 불렀다. 모를 심을 때부터 피기 시작하여 벼를 벨 때까지 피어있는 꽃이 배롱나무꽃이다. 배롱나무꽃이 100일 동안 연해 핀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 하거니와, 벼의 생장 기간이 바로 100일이다. 어머니는 저 꽃이 다 지면 햅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선운사 만세루 앞뜰의 배롱나무

가을꽃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꽃무릇이다. 지금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꽃무릇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원조는 역시 선운사 꽃무릇이다. 선운사 꽃무릇은 9월 말이 절정이다. 꽃이 1주일도 가지 않는다. 조금만 늦으면 흔적도 없다. 다행히 올해는 그 절정을 보았다. 말 그대로 꽃이 끝 간 데 없이 피었는데, 건너편의 푸른 동백숲과 靑紅을 나누는 것이 마치 수평선이나 지평선처럼 보여 나는 그것을 ‘화평선(花平線)이라 이름 붙여 보았다. 그러자 시답지 않은 시가 하나 떠올랐다.



<花平線 >


무릇

꽃이 피었다 하면

이렇게 피어야 하는 것인가


무릇

그리움이 솟았다 하면

이 정도는 덮어야 하는 것인가


선운사

저 너머 동백숲을 반으로 가른

相思의 一線을 화평선이라 부를까


저 相思의 一線을 화평선이라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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