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샘 Dec 13. 2022

흰 눈이 하얗게...

누구인가 귀익은 발자욱 소리에
가만히 일어나 창문을 열면
저만치 가버린 낯설은 사람
무거운 듯 걸쳐 입은 검은 외투위에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어린 나무 가지 끝에 찬바람 걸려
담 밑에 고양이 밤새워 울고
조그만 난롯가 물 끓는 소리에
꿈 많은 아이들 애써 잠들면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한겨울 바닷가 거친 물결 속에
잊혀진 뱃노래 외쳐서 부르다가
얼어붙은 강물위로 걸어서오는
당신의 빈속을 가득 채워줄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흰눈이 하얗게

조동진, <흰 눈이 하얗게>    

 

'흰 눈이 하얗게'가 실린 조동진 1집 음반

눈을 감고, 조동진의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그곳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내가 저만치 가버린 낯선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밤새워 우는 담벼락 밑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걸어서 그대에게 가기도 합니다. 

    

흰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이제는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황동규, <즐거운 편지>)고 편지를 쓸 연인도 없습니다. 또한 중국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새벽, 섬계(剡溪)에 사는 벗 대규(戴逵)가 생각나 배를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자 만나지도 않고 돌아왔다는 고사처럼 불현듯 찾아갈 벗도 멉니다. 그럼에도 펑펑 내리는 흰눈은 공연히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죽을 때까지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기를 원했던 워즈워드처럼 나도 죽을 때까지 흰눈에게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본조르노, 시칠리아-18.팔레르모에서 만난 '마씨'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