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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Aug 21. 2023

필요 있는 것과 필요 없는 것

요즘엔 은행에 갈 일이 없다. 지갑도 가지고 다닐 필요가 물론 없다. 거의 모든 금융 업무는 스마트폰 하나면 해결된다. 이제 통장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두꺼운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불편도 없다. 심지어 이제는 카드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나도 스마트폰 하나에 카드가 3장이나 내장되어 있으며, 은행에 관련된 앱이 모두 깔려있어 위에 열거한 그 무엇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예금 만기가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그러니까 꼭 1년만에) 은행에 갔다. 한가한 오후 시간이라 금세 일이 끝나겠지 하고 나름대로 시간 계산을 하고 간 터이다. 다행히 은행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번호표를 뽑으니 내 앞에 4명이 있단다. ‘흠... 4명이면 잘하면 10분, 늦어도 20분 안에는 일을 볼 수 있겠군.’이라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오산이었다. 

일단 은행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직원들 빼고는 내가 가장 젊었다. 창구마다 어르신들이 앉아계시는데, 20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차례는 언제 올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같은 말을 묻고 또 묻고, 급기야는 젊은 은행원이 “아까 말씀드렸잖아요.”라든가, “왜 금세 다른 말씀을 하세요?” 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또 급기야, 그 어르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신다. “비밀번호가 뭐야? 뭐? 응...”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내 차례가 왔다. “어르신들 때문에 창구를 없앨 수가 없겠네요.” 말을 건네니 은행원이 웃는다. “저 어르신들 때문에 당신 자리가 남아있는 거에요.”(내 말에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예금을 해약하고 약간의 이자를 현금을 찾고 재예치를 하는데 무슨 앱을 깔면 이자를 더 준단다. 앱을 까는데 2분 정도가 걸렸고, 그동안 은행원은 해약 처리를 했다. 앱으로 재예치를 하고, 새로운 서류에 이름 몇 군데 쓰고 나니 끝이다. 아마 5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내 뒷번호를 가진 어르신이 반색을 했다.

은행을 나오면서 생각한다. 앞에서 내가 다 ‘필요 없다’고 한 것들이 정말 필요 없는 것들인가? 사람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진정 더 편리해지고 삶의 질은 더 좋아졌는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다가, 아니 지금이 8월 하순이고 낼모레면 처서라는데 더위는 도대체 언제나 물러가나 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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