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깨 볶는 냄새로 집안이 가득하다. 어버이날을 맞아 시댁에 다녀왔다. 아버님과 함께 점심 먹고 집에 오려는데 까만 봉지를 내주시며 "참깨 없지?" 하시면서 참깨와 고춧가루를 내어 주신다. 참 신기하게도 부모님은 자식들도 많은데 그 자식의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없는지 다 보고 계시는 거 같다. 일주일 전 참깨가 똑떨어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먼저 얘기해 주며 챙겨주시는지 참깨를 볶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예전에만 해도 그렇게 흔하던 참깨가 지금은 너무 귀해졌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님이 이렇게 연로하지 않아 농사를 많이 지으셔서 늘 풍족하게 먹거리를 주셨다. 결혼하고 14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깨를 항상 볶아서 시댁 갈 때마다 챙겨 주셨다. 우리 집에는 늘 참깨와 들기름 참기름이 풍족했다. 때때로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깨와 참기름이 없다고 하면 내가 생색을 내면서 주기도 했다. 귀한지 모르고 먹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부터는 아버님이 생 깨를 주시면 집에 와서 볶아서 먹는다.
풍족하고 흔할 때는 귀한지 모르다가 그런 풍족함이 사라지고 없을 때는 귀한 마음이 든다. 인간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도 꼭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어리석음이 있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님이 항상 깨를 볶아 주시다 그냥 생 깨를 주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깨를 볶는다'라는 말은 들어 알면서도 우리가 먹는 생 깨를 볶아 먹는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어머님이 늘 볶아서 주셨기에 너무 당연하게 볶음용 깨라고만 생각하고 음식에 깨를 넣어 요리를 했는데 자꾸만 돌 같은 게 씹혔다. "뭐야. 어머님이 왜 이런 걸 주셨지. 돌 때문에 먹지도 못하겠네" 하고는 생 깨를 다 버렸다. 한참 뒤 시댁에 가서 어머님과 대화하다 "깨에 돌이 많아서 못 먹었어요. 이번 깨가 안 좋은가 봐요?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는 척까지 하고 나니 어머님이 기가 막힌 듯 "그래 그 깨는 어떻게 했니?"물어보길래 "다 버렸어요. 어머니 못 먹겠던데요. 돌이 너무 씹혀서요"라며 얘기했다. 어머님은 며느리 얘기를 듣고 화가 나실 만도 한데 다시 설명을 해 주시며 깨는 씻어서 볶아야 한다며 방법을 일러 주셨다. 그 이후로 한동안 어머님은 나에게 생 깨를 주지 않고 다시 볶아서 주셨다. "이건 볶은 거니 그냥 먹어도 된다" 하시며 주셨다. 어머님의 생각으로 10년이 넘게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왔으니 깨 볶는 것도 모를까 싶어 당연히 알아서 해먹거니 하고 주셨을 텐데 그런 불상사가 있었으니 얼마나 기막힐 노릇이었을까?
어머님은 무척 헌신적인 분이셨다. 허리가 구부려져 잘 피시지도 못하시면서 자식들 위해 철철이 김치에 마늘까지 빻아서 주시고 깨도 볶아서 주셨다. 참기름 들기름도 한 번도 떨어뜨린 적 없을 정도로 풍족하게 주셨다. 그때는 김치 해 놨으니 김치 가져가서 먹으라는 말이 왜 그렇게 귀찮게 느껴졌는지 참 모를 일이다.
어머님은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그중 김치의 맛은 으뜸이셨다. 계절마다 김치를 담느라 들인 어머님의 노고를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할 일이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런 어머님이 김치 핑계를 대며 자식들을 부른 다고 생각하는 철없는 며느리였으니 그때는 왜 그렇게 모르는 게 많았는지 아니면 몰랐다고 핑계를 대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아침 깨를 볶으며 생각한다. 깨를 볶는다는 사전의 의미로 서로 정답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다라는 뜻이 있다. 다른 걸 볶아도 되는데 왜 하필 깨였을까? 깨의 고소한 향과 맛에 중점을 둔 표현으로 오붓하거나 몹시 아기자기하며 재미가 있어 보이는 상태를 지칭하며 신혼 때 애정도가 높으면 깨를 볶는다, 깨가 쏟아진다는 은유를 하곤 한다. 그런데 깨를 볶아보면 안다. 깨 볶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지. 그런 어려운 걸 잘 할 때 듣는 표현이니 깨 볶는다는 은유 표현이 또 얼마나 적절한 은유 표현인지 새삼 알게 된다
아버님이 주신 참깨를 물에 깨끗이 씻고 잔 이물질들도 걸러내고 흙과 돌을 채로 걸러내 몇 번을 씻는다. 10년째 아버님이 주신 생 깨를 씻고 볶으면서 오늘 주신 깨가 흙과 돌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아니 마음이 안 좋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아무렇지 않았을 이 상황이 오늘은 문뜩 마음이 간다. 농사라는 것이 농부의 정성과 땀으로 거둬들인 결과물이다. 작게나마 텃밭을 가꾸면서 어떤 마음으로 먹거리를 키우는지 알기에 그 마음이 보인다. 평소 3~4번 씻으면 깨끗해질 생 깨가 오늘은 8번을 씻었다. 즉 이 얘기는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시는 게 예전 같지 않고 버거워 수확하는데 작업이 줄었거나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아 수확하는데 어려움이 있으셨을 게 느껴진다. 한 톨 한 톨 소중하게 씻고 채에 걸러 물기를 빼고 천천히 볶는 과정을 하면서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아버님의 수고와 노고가 보인다. 이 번거롭고 손 많이 가는 깨를 한 번도 싫은 소리 없이 볶아서 주신 돌아가신 어머님의 정성과 자식 향한 마음이 느껴진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내일이면 어버이날이 있어 미리 시댁으로 친정으로 다니며 부모님을 뵙고 용돈도 드리고 함께 식사도 하고 왔다. 법륜스님의 말씀대로 부모 자식 관계는 까르마가 있다고 한다. 부모가 쌓은 공덕을 자식이 그대로 받고 그 자식이 받은 공덕으로 또 그 후 자식으로 연결되니 내가 지은 공덕과 까르마는 잘 쌓을수록 좋은 인연으로 연결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부모님께 받은 후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님께 그런 따뜻한 정성과 마음을 받았으니 역시 좋은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가정의 달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요즘 안 받고 안 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때로는 그것도 편하겠다 싶을 때도 있다. 양쪽 부모님 찾아뵙고 용돈 드리고 음식 준비해서 갈 때면 높아진 물가와 돈의 씀씀이가 해 퍼진 요즘 주머니가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러나 1년 딱 한 번 부모님을 생각하고 나를 위해 자식을 위해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뒷바라지 해준 부모님을 위한 마음을 생각하면 그 또한 당연히 해야 할 자식의 도리로 되돌아온다. 내가 들인 돈과 시간보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자식을 위해 썼을 돈과 시간을 생각해 보면 과연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싶다.
삶은 분명 연륜이 필요하다.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알게 되는 것들이 오롯이 시간이 흐르고 나를 알아가는 오십이 되어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그런 것들을 조금씩 알아갈 때쯤 부모님들은 늙고 병들고 더 이상 내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자주 웃고 찾아뵙고 대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