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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10. 2022

두번째 봄01 - 풀꽃반지

풀꽃반지

풀꽃 반지   

 

  따뜻한 5월의 오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천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길 양옆에 유난히도 토끼풀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이건 종인가 봐. 이렇게 꽃이 크지 않았었는데, 키도 크고~”     


  분홍색도 있고, 하얀색도 있고. 길가 가득 피어있는 꽃을 본 엄마는 신이 나 보였다.


“어릴 때는 저걸로 반지도 만들고 그랬는데.. 엄마도 그랬어?”

“그럼, 엄마 어릴 때야 이런 거 말고 가지고 놀 게 있었니? 풀이고 돌이고 그런 거나 가지고 놀았지.”     


  그러더니 멈춰 서서 내게 팔찌를 만들어 주시는 엄마. 나도 반지 하나 해드리고 두 손 모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라, 사진을 찍고 보니 엄마랑 나랑 손이 닮았다.   

  

“아빠랑만 닮은 줄 알았는데, 엄마랑은 손가락이 닮았네.”

“그런가?”

“봐요. 새끼손가락 짧은 것도 그렇고. 약지보다 검지가 짧아. 검지가 긴 사람도 많은데.”

“그러네.”   

  

  아빠랑은 워낙 어릴 때부터 얼굴이 닮았단 이야길 많이 들었고(내가 봐도 아빠의 군대 시절 사진은 그냥 삭발한 내 모습이다), 병원에 있을 때같이 침대에 앉았다가 발가락마저 닮았다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에서야 엄마랑만 다니니 모녀가 닮았단 소리를 듣지만, 아빠도 함께 있으면 늘 “따님이 아빠 닮으셨네요” 소리를 들었더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엄마랑 나랑 손 모양이 닮은 것이다. 전에는 참 고왔을, 어느덧 피부색도 좀 변하고 주름이 가득한  손을, 처음으로 오래도록 바라봤다. 혈액 순환이 잘 안 돼서 언제나 조금은 얼어있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그냥 꽃이 이쁘다 하고 지나쳤을 텐데, 풀꽃 반지, 풀꽃 팔지 커플 액세서리를 맞췄기 때문일까? 그날따라 끊어질 때까지 반지, 팔찌를 풀지 않고 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더워서 물가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엄마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가 맘에 안 든다며 모자를 거꾸로 쓰신다. 생각해 보니 엄마가 모자를 뒤로 쓴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아 냉큼 사진 한 장 찍자고 제안을 한다.    

  

“오면서 찍었는데 또?”

“아까는 손만 찍었으니까. 얼굴이랑 꽃반지 나오게 같이 찍어요. 잠시만, 나도 머리 정리 좀 하고~”  

   

  그렇게 둘이 똑같이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쓰고, 오는 길에 맞춘 풀꽃 팔찌, 풀꽃 반지 들고 기념 촬영 찰칵.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있지만 아마 웃고 계셨을 거다. 산책하다 풀꽃 반지 만든 날, 엄마랑 사진 찍은 장면을 그린 날, 닮은 두 손을 그린 날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특히나 손을 그리면서 사진 속의 엄마 손과 내 손을 정말 찬찬히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좀 더 고울 때 알아보지 못해 아쉽고(어려서부터 항상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만 들어서 맘 한구석에서는 엄마가 서운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늘 시리다는 손 자주 잡아주지 못해 미안하고,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잡아줘야지 다짐해 본다. 이 손 그림이 이 책을 써야겠다 싶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에 가장 감사하는 지점. 내가 아가였을 때 말고, 성인이 되어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과연 엄마랑 이렇게 자주 산책을 했을까. 나는 그냥 이런저런 약속에 밖으로 다니기 바빴을 텐데. 코로나 때문에 참 많이 답답하고, 행동에 제약도 생겼지만, 덕분에 엄마랑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밥을 먹고 나면 당연하게 산책을 나선다. 그거 말고 할 게 없으니까.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가끔은 이렇게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어릴 땐 엄마가 나를 돌봐주는 것, 엄마랑 이야기하는 것도 당연했을 거다. 어릴 적의 나는 저녁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떠들어 대고, 그 이야기 들어줄 엄마가 옆에 있어 행복했을 텐데(엄마는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피곤했겠지만). 그래서 꼬마였던 난 일하러 나간 엄마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거 아닐까? 성인이 된 나는 어느 순간 독립했고, 다시 함께 살게 된 후에도 그저 집에 돌아오면 지쳐 쓰러지기 바빴다. 일 마치고 돌아올 엄마를 기다렸던 어린 나처럼, 지금의 엄마도 일하고 돌아와 자신을 바라봐 줄 나를 기다렸을 것 같은데. 애들에게 치이고, 학부모에게 치이고, 동료마저 이상한 일을 벌이기도 하면 집에 와서 입을 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밥 먹고 멍하니 TV 좀 보다 눈이 감기면 슬며시 쓰러져 잠이 든다. 이게 하루의 끝. 함께 살게 된 직후에는 엄마가 그 나이에 그렇게 일찍 지치면 어쩌냐며 어디 아픈 거 아닌지 병원 가보자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사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성실한 나의 동료들은 집에 가면 쓰러져 잠이 든다. 중간에 깨어나서 다시 집안일, 학교 일을 하게 되긴 하지만 말이다. 뭐, 먹고살기 위한 밥벌이 중에 안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학교에서의 하루는 정말 사람 진을 쏙 빼놓는다. 그렇게 꾸역꾸역 평일을 버티고 주말이 되면, 하루는 종일 늘어져 있고, 하루는 겨우 정신 차려 학교 밖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근데 코로나 덕분에 사람을 못 만나니, 엄마랑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확보되는 것이다. 엄마랑 이렇게 손잡고 걸을 시간이 있다는 것,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며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물론 마스크 없이 할 수 있으면 더 행복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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