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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12. 2022

두번째 겨울03 -대물림

대물림


"참, 엄마, 조끼 왔어요~ 아까 나 들어올 때 갖고 들어왔는데 말을 못 했네."

"왔어?"

"응, 입어보세요."


  며칠 전,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조끼를, 굳이 사주고 싶다며 엄마가 홈쇼핑에서 조끼 두 장을 구매했다. 검은색 66 사이즈 엄마 꺼 하나, 겨자색 55 사이즈 내 거  하나. 분명 같은 날 샀는데 내 것만 오고, 엄마 것이 감감무소식이다가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씻으려다 말고 택배 상자를 뜯었다.


"괜찮네, 그래 이게 맞는 거지."

"내 거 입으셔도 될 거 같은데, 별 차이 없어 보여."

"그럼 대 봐."


가져다가 길이며 폭을 비교해보니 1cm 정도 차이가 난다.


"봐요, 별 차이 없지. 그날 기분 따라 입으면 되겠네. 산뜻하고 싶으면 겨자색, 폼 잡고 싶으면 까만색."

"그러네. 그럼 니가 그거 입어도 되겠다. 엄마 가죽자켓"


  다른 사이즈의  조끼 2장을 샀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서로 바꿔 입어도 되겠단 소리 하다 말고, 엄마는 30년 된 엄마의 가죽 재킷을 꺼내오신다.


"이게 멀쩡한데, 난 이제 추워서 못 입어. 너 입을래?"

"괜찮은데요? 가볍네."

"나한테 맞춘 거라 품은 맞는데 팔뚝이 너무 넓어. 나 마른 건 생각 안 하고 만든 거지. 하긴 그때 이렇게 팔 통이 넓은 게 유행이었어."

"괜찮아요, 요즘 레트로라고, 복고가 유행인데 뭐. 근데 이걸 뭐랑 입지?"

"난 바지랑 입었어. 그때는 나팔바지가 유행이었거든. 안에 목폴라 받쳐 입고 바지 입으면 예뻐."

"응, 밑에는 모르겠고 어릴 때 엄마가 이 자켓 입고 학교 오고 했던 기억은 있어요."

"그게 옛날에 니  아빠가 돼지 키우는 지인한테 가죽 얻어와서 맞춤 제작한 거야. 원단이 모자라서 목 칼라 부분만 다른 거죽을 댄 거잖아."

"그래서 그런가. 목부분이 많이 닳았네. 목부분만 수선할까?"

"그 수선비가 옷값만큼 하겠다."

"그런가? 그럼 그냥 몇 번 입지 뭐."


  재킷 안에 받쳐 입을 옷까지 이것저것 꺼내보다가 암마의 재킷은 내 옷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TV를 보다가 문득 던진 한마디.

 

"근데 그 옷이 돼지가죽이라고? 아빠가 옛날에 돼지 농장 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돼지 농장을 한 게 아니라, 돼지 농장 하는 사람한테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겠다고 평택 가서 살았었어. 뭐 심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아무튼 너  갓 지난 거를  고랑에  놓고 보면서 나랑 아빠랑 밭일을 했잖아."

"어, 난 서교동에서 태어난 거 아냐?"

"잠깐만. 아, 그럼 니 오빤 가 보다. 맞아, 니 오빠 돌 지나고, 돌 때 사진관 갔는데 하도 울어서 돌사진도 못 찍었잖아. 집에서 상 차려 놓고 할머니랑 찍은 사진은 서교동이고, 돌복 입혀서 독사진 찍은 건 두 돌 때 평택 살 때였어. 거기서 한 2년 지냈나 봐."

"이건 첨 듣는 얘기 같은데.ㅎ"

"주방에 방하나 딸린 집 월세를 내고 살았나. 암튼 니 아빠가 농사짓고 싶다 해서 거기서 지냈지. 아빠가 얼마나 효자였는 줄 알아? 차도 없을 시절인데 한 번씩 인절미 한말 해가지고, 오빠 끌어안고 낑낑거리며 시외버스 타고 할머니 보러 가고 했어."

"효자셨네."

"그랬지. 그거 싫다 한 적 없어. 어머니한테 하는 거니까. 그저 지나고 보니 난 울 엄마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못 해 드려 속상해. 오랜만에 친정 갔는데 동네 사시는 집사님이 '너희 엄마 그리 이가 아프단,' 하셨었는데 돈이 없으니 할머니 모시고 치과 한번 못 가봤어. 그게 그렇게 맘에 걸려."

"그러게, 아빠가 할머니한테 한 건 아들 도리 한 거고..  엄마가 외할머니한테 못 해 드린 건 속상하다."

"맞아, 니 아빠가 할머니한테 잘하는 거에 대해 불만 표시 한 적 없어. 자식 도리 하는 거니까. 난 당장 주머니에 돈 들어올 일 없는 형편 생각하니 내 부모한테 너무 못해서 그게 가슴 아프지. 돈 없어도 니들 이 아플 때는 치과 갔는데.."

"에휴, 멀리 살아서 더 했을 거야. 자주 가 보지도 못했고. 우리야 코앞에서 칭얼거리니 어떻게든 병원 간 거고. 옆집 사셨어봐. 우리 병원 갈 때 같이라도 갔을걸?"

"그랬으려. 아무튼 내가 엄마, 아버지한테 너무 해드린 게 없어서 늘 마음에 걸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씁쓸해하시는 엄마다. 어릴 적부터 가장 노릇하면서 외로웠고 곁에 있는 할머니랑 고모가 끊임없이 신경 쓰였을 아빠도 이해가 가고, 경제적으로 힘들고 시댁과 같이 혹은 가까이 살며 눈치 보느라 멀리 떨어져 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용돈 한 번 제대로 못 쥐어드려, 병원 한 번 같이 못 가 마음에 한이 맺힌 엄마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여러 모로 아빠의 일은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엄마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보험이며 아동전집 등 여러 회사의 영업직으로 일을 하셨다. 영업이란 일을 하니 겉으로 보기에 멋스럽게 입고 화장도 곱게 하고, 내 눈에는 그저 멋지게만 보였던 것 같은데 뒷이야기는 참 슬프다. 경제적으로 힘드니 엄마가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이유로 마음이 고달파져서 한동안 안 다니던 교회를 찾아간 적도 있는데(할머니가 엄마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셔서 못 가다가 따로 살 때 가신 거였다), 버스비가 없어 몇 번을 걸어가셨단다. 그러니 한 두 번 가다 말고. 차비 없어서 출근을 못한 적도 있다니 경제적 어려움이나 거기서 왔을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할 말 다 했고, 나랑 키가 비슷한데 40kg 조금 넘었으니 체력적으로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어릴 적 기억 속 엄마는 항상 말랐다 싶을 정도로 날씬했던 모습이라... 처녀 적 엄마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난 통통한 엄마를 찾지 못했다. 커 가면서 가끔 엄마 속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임신하셨을 때 10달 내내 입덧을 해서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됐다. 어렸을 땐 그저 엄마가 날씬했다고 생각했지, 힘들어서 살이 찌지 못한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ㅜ.ㅜ


  엄마는 소심한 자기 성격에 영업일을 하려니  힘들었다고 늘 말씀하신다. 근데 생각해보면 엄마는 말발이 꽤 좋았던 것 같고, 그런 점을 내가 닮았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의 엄마는 말발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고, 지금의 나도 말로 먹고 사니 말이다. 게다가 엄마가 팔며 집에 구비해둔 책들 덕에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으니, 내가 지금 애들 가르치고, 글 쓰고 하는 것도 다 엄마 덕이지 싶다.


  다음날 오은영 박사님이 부모와 자식 간의 애착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던 엄마가 하신 말씀.


"난, 시집살이하면서 할머니 앞에서 니들 맘껏 예뻐라 해주지도 못했어. 조심스럽다 보니 그런 건 아주 못하는 거 같아."

"그러게. 생각해 보면 엄마랑 끌어안고, 뽀뽀하고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네."

"아빠가 니들 생각 끔찍하게 챙겼지."

"응, 아빠랑은 뽀뽀한 기억이 있어. ㅎ"

"난 살기가 너무 힘들었나 봐. 그런 표현할 생각도 못한 거 같아."

"괜찮아, 엄마. 지금부터 많이 하면 되지 뭐."


  그리고 엄마 손을 스윽 만지니 엄마가 씨익 웃으신다. 사실 나도 엄마를 안아주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한다거나 하는 것은 오글거려서 잘 못한다. 그저 늘 혈액순환이 안돼서 손 시리다 하시니 가끔 온도 체크하듯, 툭 치듯 손 한 번 잡아 보는 게 전부다. 그런데 이날 대화를 하다 보니 앞으로 출퇴근할 때 어색하더라도 엄마를 한 번씩 안아줘야지 싶다. 뭐, 어색하겠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러면서 살아오며 얼어붙은 감정도 되살아나고, 다친 마음도 조금씩 나아지겠지.


한마디로 결론은? 있을 때 잘하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계실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슬퍼하는 엄마. 아빠 살아계실 때 좀 더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나. 아픔, 아쉬움은 이제 그만. 손 때 묻을수록 멋이 드러나는 옷,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질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깊어질 사랑만 대물림! 지난날 아픈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엄마랑은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기고 싶다.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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