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드라이브> 생명에도 무게의 차이가 있는가?

고령화사회에 즈음하여

by CaleB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 이 노인네하고 우리 연희 인생하고 똑같아?"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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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저자 정해연 출판 앤드(&) 발매2025.03.25.


그는 눈을 감고 운전석에 기댔다. 이걸로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랐다. 그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 균탁


정혜연의 소설 <드라이브>는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노인 운전 문제를 다룬다. 지난 시간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급발진하는 사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고 뒤에는 노인 운전 문제가 연결된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가 자동차의 결함인지는 알 수 없다. 이해당사자들의 주장이 첨예하게 다르고 운전 자료들로도 완전히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 급발진인 경우도 있고 운전미숙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노인 운전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환경의 문제를 다룬다. 76세의 노인 균탁이 왜 운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지만, 책을 뒤로 돌려 피해자의 어머니 혜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에피소드를 읽으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아이와 가족의 사연이 그려진다. 이 소설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이렇게 한 가지의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점을 균등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은 균탁은 자녀들을 돕기 위해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이를 잃은 부모 혜정은 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말한다. 여기에서 교통사고라는 사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불가항력의 사고였다.


소설은 각각 균탁과 혜정이라는 주인공이 반대 방향에서 출발해 가운데 작가의 말로 연결되며 끝맺는다. 모두에게는 사연이 있다. 일부러 일으킨 사고가 아니라면 그 사건을 둘러싼 배경들 중에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우연히 터진 것뿐이다. 사실은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삶이 던진 돌에 맞은 피해자들이다.


소설에 드러난 이슈 몇 가지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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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고령화되면서 많은 노인 운전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노화되고 있는 인지 기능을 따라 운전 제한을 한다면 어떤 기준이 적용돼야 하는가? 노인들이 받는 복지인 지하철 무료 탑승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제는 스스로의 경제활동으로 생활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노인들의 생계와 이동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생명의 가치에 대한 시각이다. 젊은이와 노인의 목숨의 가치는 다른가? 평균적인 시각으로 젊은이는 아직 더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에 노인보다 목숨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까? 평균수명이 증가하면서 70세라는 나이는 이제 곧 죽을 나이는 아니다. 앞으로 30년, 50년을 더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 나이다. 젊어도 빨리 죽을 수 있다. 물건과 같이 사용연한으로 생명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옳을까? 생명의 무게는 나이로 가늠될 수 없다. 젊다고 해서 더 귀하고, 늙었다고 해서 덜 소중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부터 생명을 '기대수명'으로 저울질하게 되었을까?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사용기한이 없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윤리적 성찰을 요구한다.


피해자와 가해자란 구분은 피해자는 선한 사람이고 가해자는 악한 사람이라는 의미일까? 혜정은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랑을 쏟았는지 이야기한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한 운전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오히려 피해자 혜정이 가해자 균탁을 살해하는 것을 끝맺는다. 사실상 선악의 구분을 뒤집는 결말이다. 이것은 정의인가, 복수인가, 더 깊은 절망인가? 선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자신이 처한 입장만 존재한다.


성경에서는 용서만이 구원을 이룬다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로마서 12장 17절)


어쩌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 아닐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려는 상상력, 그리고 결코 쉽지 않지만 결국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용서라는 이름의 선택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실수가 치명적이고, 되돌릴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모든 일은 상대적이다. 소설을 앞뒤로 읽으면서 모든 사람에게는 사연이 있음을 보게 된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각이 바로 성경의 이웃사랑이다. 소설의 충격적인 사건 내용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Spirit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누가복음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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