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만 5세가 되자 아내는 아이를 일반 유치원 대신 영어유치원에 보내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많이 쓰는 환경에 노출시켜, 영어만큼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유치원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여러 곳의 영어유치원 설명회를 다녀오는 등 영어유치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기에 앞서 우선 영어유치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용어부터 정리하자면 소위 ‘영유’라고 하는 영어유치원은 ‘영어학원 유치부’가 원래 뜻이다. 영유는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하며, 아침부터 오후까지 원어민 강사와 함께 오직 영어로만 말하는 학원을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이라는 점이다. 영어유치원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치원은 유아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기관만이 붙일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말하는 영어유치원은 잘못된 표현이며 정확한 표현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 영어학원 유치부일 뿐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영어유치원이라고 쓰면 불법이다. 현실과는 왠지 동떨어져 있다. 명칭이야 어떻든 인구 감소에 따라 일반 유치원은 지속해서 감소 중인데 영어유치원은 증가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영어유치원은 2019년 615곳이었는데 2020년 724곳, 2021년 718곳, 2022년 811곳, 2023년 842곳 등으로 늘어났다. 반면 일반 유치원은 2019년 8,837곳에서 지난해 8,441곳으로 줄었다. 조선일보 기사(2024.05.16. 조선Biz)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높아져 경쟁이 치열하며, 아이들을 선착순으로 선발해 원하는 영어유치원을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차선책으로 인근 다른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원하는 영어유치원에 빈자리가 나면 옮기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런 가정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문기사나 뉴스에서 나오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유치원 비용이 월평균 120만 원이 넘어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데도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려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영어유치원이 가지는 여러 가지 기대 때문일 것이다.
영어유치원의 첫 번째 기대는 조기 언어 습득에 대한 기대다. 유아기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난 시기라 영유를 다니면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다. 발음, 억양, 문법 등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으며, 나아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영어 습득의 효과와 더불어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유아기에 모국어는 물론, 영어까지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배우며 아이는 언어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다.
두 번째 기대는 글로벌 마인드 형성에 대한 기대다. 영어권 국가의 문화를 접할 다양한 기회가 제공되어 글로벌 마인드를 형성할 수 있고, 해외 유학이나 국제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문화적 충격을 덜 받게 될 수도 있다. 다른 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어 문화적 감수성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세 번째 기대는 자신감 향상에 대한 기대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두려움을 덜 느끼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움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곧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기대는 미래 아이가 해야 할 학습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기대다. 영어유치원에서 배운 기초 영어 능력은 이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에서의 영어 학습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조기에 영어 환경에 노출된 아이들은 학업적으로도 더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또한 국제학교나 해외 유학 등의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반대로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어유치원은 단점도 명확하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높은 비용이다. 일반 유치원보다 당연히 비싸고, 심지어 대학교 등록금보다도 비싼 교육비는 분명 부모들에게 큰 고민거리다. 이 외에 교재비, 가방 구매비, 특별활동비 등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며 교복과 체육복도 기성복보다 훨씬 비싸다.
두 번째 단점은 아이가 겪는 문화적 충격이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유치원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경우 아이는 혼란을 느낄 수 있고 이는 정서적 안정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어유치원의 교육방식이나 규율이 가정의 문화와 다를 경우 아이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세 번째 단점은 균형 잡힌 언어 발달의 어려움이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아이들이 모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줄어들어 모국어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우는 것이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언어 발달의 속도와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네 번째 단점은 학습에 관한 스트레스다. 충분히 놀아야 할 시기인데 두 언어를 동시에 배워야 하는 아이가 소화해야 할 학업량이 상당하다. 이는 아이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놀이와 휴식이 중요한 유아기에 너무 많은 학습 부담은 아이의 정서적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영어유치원에서의 학습 압박으로 인해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학습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형성할 수도 있다.
다섯 번째 단점은 원어민 교사의 자질이다. 교사의 능력이나 인성을 검증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장기근속하는 원어민 교사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여섯 번째 단점은 좁은 교실과 놀잇거리의 부족이다. 직접 둘러봤던 여러 영어유치원의 공통점인데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무척이나 협소했다. 한정된 공간에 일반 유치원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놀잇거리도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어유치원은 장단점이 너무나 선명했다. 영어유치원을 알아보다 문득 궁금했다. 언제부터 어린아이들에게 학습을 강조했나? 우리 어릴 때만 해도 학습(한글, 영어, 한자 등)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그것도 고학년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학습이란 걸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말도 못하는 유아기 때부터 학습이란 걸 시작하게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유아교육 취원율(만 3~5세 인구 중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의 비율)이 2002년 56.9%에서 2012년 87.7%, 2022년엔 94.3%로 늘어났다. 이제 거의 모든 아이가 만 3~5세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교육을 받는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영유아가 보육기관에서 교육기관으로 간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맞벌이의 영향일 수도 있고 조기교육에 대한 열망일 수도 있다.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관리하는 영향일 수도 있다.(이때 유치원입학관리시스템인 ‘처음학교로’가 열린다.) 이렇게 높아진 유아교육 취원율에 편승해 고가의 영어유치원이 부모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영어유치원의 역사도 그만큼 길지 않다는 뜻이다. (영어유치원 설립 추이 2009년 181곳에서 2023년 842곳, 교육부)
영어유치원 장단점과 별개로 영어유치원이 효과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뭘까를 알아봤다. 영어유치원이 효과 있는 경우는 간단하다. 영어유치원에서 하는 영어가 집에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으면 된다. 집에서 영어 노출이 되어야 하는데, 부모님이 영어에 능숙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별도의 영어 선생님을 붙여줄 경제력이 있으면 된다. 또한 영유 졸업 후 사립초나 메이저급 영어 어학원 등으로 연계해 지속적인 영어공부 지원이 가능하다면 영어유치원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반면 집에서 영어 노출 없이 영유만 다닌다거나, 부모님이 영어 숙제를 봐주지 않고 영유 졸업 후 동네 학습식 영어학원에 다닌다면 영어유치원 효과는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여러 곳의 영어유치원 설명회를 다녔고 아이와 함께 레벨 테스트도 봤다. 심사숙고 끝에 우리 부부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협소한 장소에 아이를 온종일 앉아 있게 한다는 게 싫었다. 물론 놀이식 영유도 있다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아이가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게 싫었다.
둘째, 행간의 의미와 뉘앙스를 모르고 읽고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독해력은 둘째치고 모국어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구어로 이루어진 영어를 한다고 영어가 향상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집에서 영어로 대화할 수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나는 잘하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잘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비싼 돈 주고 영어유치원 보냈으니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했다.
넷째, AI를 필두로 IT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Chat-GPT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나온 ChatGPT-4o는 거의 원어민에 가깝게 번역해준다. 그것도 사람 음성을 바로 인식해서 실시간으로 번역해준다. 세계 수십 개국 언어로 말이다. 아이가 클 때는 어떤 기술이 나올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다섯 번째, 영어유치원 설명회와 레벨 테스트를 하면서 겪은 일들 때문에 보내기 싫었다.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에서 만 5세는 늦었다고들 설명했다. 적어도 만 4세부터는 시작해야 한단다. 말도 글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고작 1년 늦게 영어유치원 갔다고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처럼 설명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인생은 길고, 넘어졌다고 하기엔 너무나 이른 시기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아이에게 실패감을 안겨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OO어학원 가방을 메고, 그럴듯한 교복 정장을 입은 아이들을 볼 때가 있다. 단정한 교복에 자신감 있는 아이 얼굴을 보면 우리 아이도 영어유치원에 보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든다. 내 모든 걸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 끝에 우리는 선택했고, 선택에 미련은 없어야 한다.
영어유치원 하나를 보더라도 아이 키우는 데 정답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 상황에 따른 판단만 있을 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메타인지가 제대로 성립된 상황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선택이 옳았음을, 옳지 않더라도 올바르게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음을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막히지 않고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아이도 그렇게 커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다시태어나도아빠가되겠습니다
#너를위한첫번째선물
#아빠육아
#아빠육아휴직
#아빠살림
#아빠집안
본 연재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격주로 발행되는 칼럼입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홈페이지 :
https://www.betterfuture.go.kr/front/notificationSpace/webToonDetail.do?articleId=116&listLen=0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블로그 :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futurehope2017&categoryNo=60&from=post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