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사용하는 물건들은 겨울철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처럼 집안에 내려앉는다. 장난감을 비롯해 옷가지, 책들, 간식, 목욕용품, 유모차 등이 언제 이렇게 많아졌는지 늘 의문이다. 장난감이 장난감을 낳고, 책이 책을 낳고, 간식이 간식을 낳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집안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온 집안은 아이 물건으로 가득 차 버릴 것이다. 사실 정리를 해도 아이 물건들로 가득하긴 하다. 모처럼 마음먹은 김에 아이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당장 맞지 않는 옷가지를 정리하고, 크기가 큰 물건을 중심으로 필요 없는 것들은 없애기로 했다.
우선 옷을 정리했다. 아직 품에 안으면 여전히 아기처럼 작은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입을 수 없는 옷이 한가득하다. 아들이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입을 수 없는 옷들이 쌓여갔다. 아내는 옷들을 선별해 상태가 괜찮은 옷들은 당근을 통해 팔기도 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옷들은 모아서 옷 수거함에 넣었다. 아이에게 입혔던 옷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아이와의 추억도 떠올랐다. 아이와 처음 외출했을 때 입은 옷,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 입은 옷, 놀이공원에서 입은 옷, 추운 겨울날 따뜻하게 입었던 패딩까지. 정리하고 나니 큰 상자 몇 개가 나왔다. 한동안 당근 거래를 하기 위해 지하철 1번 출구를 왔다갔다했다. 팔 옷을 들고 지하철로 향해 걸어가면서 쇼핑백 속에 있는 옷을 펼쳐보곤 했다. 괜히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크기가 큰 유모차도 없앴다. 이제 아이는 유모차에 앉기보다 킥보드 타는 걸 더 좋아한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에게 발이 되어주고 짐을 실어주던 고마운 유모차를 정리하던 날 바퀴에 난 스크래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바람도 좀 빠져 있었다. 손잡이는 헤지고 의자는 꼬질꼬질했다. 아이도 타지 않고, 물건도 싣지 않은 유모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유모차가 이렇게 가벼웠구나. 늘 무겁게 들고 옮기던 기억만 있었다. 유모차 손잡이의 감촉은 여전했다. 아마 나와 가장 많이 손잡은 녀석은 바로 유모차일 것이다.
내친김에 욕조도 치워버렸다. 대형 마트에서 산, 가성비 좋다고 알려진 아기 욕조다. 국민 욕조란 별명답게 참 알차게도 사용했다. 아이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온 날 머리도 감기고 목욕도 시켰었다. 따스한 물속에서 한참을 물장구를 치며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놓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일도 떠올랐다. 물 온도가 아이에게 맞는지 팔꿈치로 온도 확인하다가 옷이 홀라당 젖기도 했던 욕조다. 지금 보니 바닥은 물때가 껴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욕조를 청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이가 언제 욕조를 찾을지 모르니 베란다에 두자고 보관만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더 이상 욕조를 찾지 않았다. 재활용 분리수거하는 날 욕조를 들고 괜히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아가 소변기도 정리했다. 기저귀를 떼던 즈음에 샀던 소변기다. 변기는 높이가 높아서 아이 키에 맞는 소변기를 샀었다. 이제 스스로 변기에서 용변을 볼 수 있으니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와 더불어 욕조 의자도 정리했다. 아이가 욕조 의자에 올라가서 손을 씻거나 양치할 때 사용했는데 소변기처럼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이 되었다. 욕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왠지 허전해졌다.
책들도 정리했다. 아기들이 보는 책답게 글자가 크고 그림 위주의 책이다. 처음 책을 보여준 것이 생각났다. 흑백 눈맞춤용 책이었는데 눈이 동글해지면서 동공 지진을 일으켰었다. 처음 보는 그림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해님, 달님, 별님, 산과 하늘, 바람과 바다가 담겨 있는 책들도 정리했다. 목이 쉬도록 흉내를 냈던 수많은 동물 책들도 노끈으로 묶었다.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던 책들인데 도무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버리기 전 노끈을 풀고 대충 훑어봤다. 한 페이지만 봐도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책을 덮고 끌어안았다. 행복했고 따스했다.
그 외에도 양말, 속옷, 신발, 미니 트램펄린, 국민문짝 등도 정리했다.
그러다 토모를 만났다. 토모를 다시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비닐봉지에 있는 장난감 무더기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한때는 토모가 아이에게 가장 소중한 장난감이었다. 조만간 버리거나 정리할 예정으로 모아둔 봉지 안에서 토모를 다시 보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상자 속에서 꺼낸 토모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토모는 공룡 트리케라톱스를 본떠 만든 장난감이다.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뽀로로 단계를 지나 타요 단계를 거치면서 공룡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만난 친구다. 하늘색을 띤 조그마한 녀석이 자동차도 됐다가 공룡도 됐다가 어른인 내가 봐도 신기했던 장난감이다. 토모를 처음 본 건 광고에서다. 아이가 뽀로로를 보고 있을 때 중간 광고로 잠깐 나온 녀석을 아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들의 토모앓이가 시작됐다. 자다가 일어나서 토모를 외치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토모를 찾기도 했다. 말도 또렷하게 하지 못할 때 엄마, 아빠 대신 토모를 외치던 아들이었다. 퇴근 후 마트에서 토모를 사오던 날 아들의 모습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던 자그마한 녀석, 흥분해서 얼굴은 벌게졌고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마구 열던 모습이 생생하다. 불도저에서 공룡으로 변신하겠다며 억지로 이리저리 뒤틀고 뜻대로 되지 않아 울먹이던 모습도 여전히 생생하다. 잠잘 때나 화장실에서도 항상 들고 다니던 모습도 바로 어제 일 같다. 아들은 온 정성을 다해 토모를 사랑했다. 내가 토모를 이렇게까지 기억하는 건 아들의 토모 사랑이 그만큼 인상적이어서다.
토모를 시작으로 렉스, 안키, 스톰, 비키, 핑, 로키, 포키, 페리를 모으고 나서야 아들은 더는 공룡 변신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어쩌다 가끔씩 토모와 친구들을 데리고 놀 뿐이었다. 그렇게 토모는 잊혀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아들은 팔베개하고 한껏 장난을 친다. 장난치다가 뽀뽀해달라고 하면 촉촉한 입술을 내민다. 차가운 그 느낌이 여전히 좋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내 품에 쏙 들어온 이 녀석이 언젠가 내 품을 떠날 것을 안다. 온몸을 서로에게 맞대어 부대끼며 느끼는 행복의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세상 전부인 아빠가 더는 세상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곧 오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삶은 흐르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만 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모든 익숙한 것들과 언젠가 이별을 한다. 옷과 유모차, 욕조와 소변기, 책과 장난감이 그랬던 것처럼 헤어짐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쨌든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걸까? 아직 나는 가까이에서도 멀리서도 희극이다.
영화 토이 스토리에서 우디가 앤디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 가! 파트너.(So long, patner.)"
이제 토모도 떠나보내야겠다. "잘가! 토모. 그동안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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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격주로 발행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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