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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Sep 26. 2021

지렁이의 반란

호구의 반항은 이해받지도 위로받지도 못한다.

기억이 시작되는 한 내 유년시절은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견디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어릴 적 원치 않는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던 방법은 단절과 회피였다.


다툼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때론 내게 가해지는 억압과 강요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그 수위와 비례되는 스피드로 상상에 빠졌다. 상상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공간 이동하여 껍질인 육체만 남겨둔 채, 나의 영혼은 전쟁터에서 나를 구해줄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드레스로 단장하고, 상상 속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도회장을 총총 걸었다. 상상의 세상 속에서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호박은 마차로 만들 수 있었고, 내게 짓궂은 장난을 해대는 오빠를 나의 시종으로 부렸다.  


글을 읽을 수 있고 나서부터는 아빠 엄마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책을 펴 들었다. 그리곤 책 속에 펼쳐진 세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현실의 치열한 전쟁터를 상상과 책을 통해 탈출하고 견디는 법을 터득했다.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편한 상황이나 다툼이 생길 때마다 어릴 적부터 연마한 공간이동 능력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연습된 단절과 회피를 통해 불편한 상황들에서 쏜살같이 탈출했다. 내 자신의 욕구를 억압했다. 참고 견디는 지구력이 떨어지는 지점에 도달하면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들을 폭발시키거나 관계를 완벽히 차단했다. 그리고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책은 나의 은신처였지만 나를 가둬두는 감옥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 건강한 애착형성에 실패했다.


섬세해서 사람의 마음은 잘 읽지만 예민하고 소심해서 타인의 생각에 조바심을 냈으며 좌지우지됐다.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으나, 가족이던 친구던 연인이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내겐 어려운 숙제였다. 항상 가슴 깊은 곳에 모터를 달고 관계의 속도를 붙이도록 나를 닦달했다. 감정을 구걸했으며 타인의 마음을 항상 확인해야 했고 확인받아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어떤 관계였던 대상이 누구였던 나는 항상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제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거절당할까 봐, 혼자 버려질까 봐, 내 감정을 돌보지 못하고 타인에게 맞춰주는 삶을 살았다.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항상 불안했다.

 

나는 사교적이지 않으며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에 예민하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만남과 이벤트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할퀴고 착취하는 사람들이라도 내겐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처럼 건강한 애착형성에 실패한 사람은 상대가 이성이던 동성이건 내게 호감을 보이면 홀딱 넘어가서 마음을 헤프게 다 퍼 주느라 에너지를 다 쓴다. 그리고 나선 더 깊고 슬픈 외로움을 느낀다.


과도한 헌신과 이해는 나를 호구로 만들었다.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호구 역할이 견디기 벅차 질 때마다 단절을 택했다. 그들에게 나의 단절은 반항이었다. 밟아도 꿈틀 하지 않던 지렁이 같은 호구의 반항은 이해받지도 위로받지도 못했다.


나는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자신과 친하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 초식동물에게도 먹잇감 취급을 당하고, 자신과 잘 맞는 타인을 알아보는 능력도 마련할 수 없다. 


내게 나이가 들면서 어린 시절과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나 자신에 대해서 구석구석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잘 알게 될수록 꽤 불쾌한 기분이 들지만, 나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판단을 하고 나면 소크라테스를 존경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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